북
한우진
아버지는 북이다 한 번도 북을 두드려 보지 못하고 북을 향해 누웠다 나는 생전의 아버지 앞에서 한 번도 북을 위로 놓고 지도를 펴보지 않았다 북을 발밑에 깔고 남으로 서울을 지나 괴산, 충주를 손톱으로 눌렀다 피 묻히고 얼룩진 자리가 고향이 아닌가요, 나는 우기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북을 따듯한 남쪽으로 그리워했다 형편없는 마당이었지만 목련은 피었다 목련은 남을 등지고 북으로만 꽃을 피웠다 아직 맺히지도 못한 나는 아버지 등을 돌려 보세요, 이쪽이 따뜻한걸요, 남풍이 불어도 아버지는 북을 향해 단추를 풀었다 북창이 많은 집일수록 아버지는 값을 높게 쳐주었다 내가 북리(北里)에 편지를 써대기 시작할 무렵 북관에서 새들이 날아올랐다 그것 보렴, 두드릴 수 있다니깐 그러나 새들은 얼음덩어리로 북적거렸다 아버지는 누가 두드려 주지 않는 북처럼 윗목에 놓여졌다 아직도 아버지는 북이다 어김없이 올해도 나는 북을 향해 아들과 함께 절을 하였다 아버지 북 받으세요,
북(北)과 북(鼓), 동음이의(同音異議)가 한 뜻으로 읽힌다. 이것은 반복의 결과. 반복과 주입을 거듭하다보면 혼돈이 찾아오고 혼돈 이후엔 수긍과 체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북(北)이란 말이 어느 날부터인가 ‘붉’과 혼동되기 시작했다. 붉다, 빨갛다! 색깔론으로 우리는 다시 길들여지기 시작했다. 성대를 잘라낸 순한 개가 되어 짖는 것도 잊은 채, 자본과 권력의 손바닥에 머리를 갖다 대기 바쁜 것이다. 북을 향해 절을 하며 복 대신 북이라도 받으시라고 말하는 자의 피가 붉다고 손가락질 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