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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을 주는 시 한 편 -18|病書 |박해람

病書                                                                                                  

 박해람

 

약봉지를 접어 내게 보낸 편지에
그대의 병력(病歷)이 붙어 있다
심신에 색(色)이 들어 그늘에도 못 들고 있다고 쓰여진 문장은 기침이 심하다
만추에 앉아서 받는 病書라니
우울한 그늘 한 자락은 도무지 잎을 떨굴 줄 모르니
그 그늘에도 차가운 얼음이 얼 것이네

여기 잠깐 그대의 필체를 들려줄라치면…

국진의 그늘에도 서리가 내리는 요즘 무탈하신가. 나는 여름 내내 풀지게를 지고 휘청거렸다네. 내 거처에는 온통 약봉지뿐이니 이렇듯 오후에 그것도 자네가 좋아하는 석양의 한 때를 빌려 보내는 友書에도 약봉지를 쓰는 것을 이해해주시게. 나는 내 몸이 전생에 온갖 약을 싸던 봉지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네. 허연 김으로 한 때의 독을 다 빼낸 물렁한 약을 싸던 약봉지. 무릇, 세상에서 덮던 이불이 수의(壽衣)가 되는 것 아닌가. 모든 색이 다 흙 속으로 돌아가듯 나도 내 거처쯤 궁금하여 오늘은 이제 돌아가도 되냐고 빈 묵정밭에게 물어보고 온 참이네.

흰 색은 세상의 독이니
내 몸에도 간간이 새치가 빠져 나온다네
장자(壯子)의 젊은 손끝을 빌려 보낸 그대의 병서는
뒤끝에 단 것이 필요한 문장이어서 한 번에 들이키지 못하고 읽었다네.

세상의 모든 귀퉁이들을 모아 만든 것이 알약이어서
내 몸에도 툭툭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다네.
한 사발 약기운조차 그대에게 보내지 못하고 얼음은 또 풀리고 말 것이네.
미진한 약효와 벗하여 소일하는 일이 바쁘시겠네
안부를 처방하여 답신을 보내네.

 

조금 앓으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지만, 많이 앓으면 죽음이 절실해진다. 조금 알면 아는 그것을 기어이 내뱉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하지만, 많이 알면 입 다물고 싶은 마음 더욱 절실해진다. 약봉지 속에 담긴 것은 알약이지만 ‘약봉지’라는 시어 속에 담긴 말은 슬픔 몇 알이다. 약에서는 죽음 냄새가 나질 않던가. 시도 이쯤 되면 경전(經典)이다. 이 시가 ‘만추에 앉아서 받는 病書’로 여겨지는 까닭은 시인의 아픔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마경을 빌려 부언하자면,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