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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타파

오룡의 역사 타파(15)

한강은‘백제의 개로왕, 조선의 선조,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을…'알고 있다.

고구려의 첩자 승려 도림과 바둑을 두던 개로왕. 왕은 바둑을 두며 은근슬쩍 말하는 도림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백제의 강성함을 과시하기 위한 대규모 공사를 시작했다.

백성들을 징발하여 성벽을 쌓고, 궁궐을 화려하게 증축했다. 대규모 공사에 백제의 창고는 비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공사장에 끌려가 농사조차 제대로 짓지 못했다. 백성들은 굶주렸고, 군사들의 무기와 군량 보급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회를 잡은 고구려의 장수왕은 475년 백제 정벌을 단행한다. 고구려의 공격 소식에 개로왕은 크게 놀랐다. 그는 태자 문주를 불렀다.

“내가 어리석어서 간사한 자의 말을 믿어 나라를 망쳐놓았다. 백성들이 흩어지고, 군사들도 약하니, 지금 고구려 군대를 막기가 어렵다. 나는 마땅히 적과 싸우다가 죽어야겠지만, 너는 우선 난리를 피하였다가, 다시 백제를 일으켜 주길 바란다.”

하지만, 개로왕은 수도를 함락시킨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아단성 아래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왕족이 몰살하고 남녀 8천여명이 포로로 끌려갔다. 

*

1592년 4월30일 새벽 2시경, 장대비가 내리는 칠흑같은 어둠속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선조는 북쪽으로 도망가는 말에 오른다.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믿었던 신립의 패전소식을 들은 선조는 그 즉시 피난을 결심한다. 한양을 사수하자는 대신들의 의견은 철저하게 무시됐다.

한강을 사수하라 명령을 받은 도원수 김명원도 도망갔다. 군사들은 흩어지고 성난 민심에 의해 불타버린 한양의 숭례문(남대문)으로 왜군 가토가 입성한다.‘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도성 안에는 아무도 없어 너무 고요했다’고 기록했다. 고니시도 흥인지문(동대문)으로 들어 왔다.‘성문은 닫혀 있었으나 아무런 저항도 없이 무혈 입성했다’라고 기록했다. 그렇게 조선은 스스로 수도 한양을 버렸다. 왕이 버리고 도망간 한양은 참담한 몰골로 왜군을 맞이했다.

*

1950년 6월28일 새벽 2시30분에 한강다리가 폭파됐다. 대한민국의 대통령 이승만은 특별열차를 타고 22시간전에 서울을 떠났다. 6월25일 새벽4시, 전면적인 북한군의 공격에 이승만은 서울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26일 한강다리에 폭파준비가 지시된다.

27일 새벽 4시에 대통령은 특별 열차에 몸을 실었다. 아침 8시 비상국회에 참석한 참모총장 채병덕은 “근일 중에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는다”라고 보고하자 고무된 국회의원들은 “100만 서울시민과 함께 수도를 사수한다”는 만장일치의 결의안을 가지고 경무대를 찾아갔다.

대전에 도착한 이승만은 전화로 녹음한 국민격려 방송을 실시한다. 서울시민들은 대통령도 우리와 함께 서울에 있다는 확신에 안심했을까?

한강 다리가 무너지는 순간, 다리를 건너던 수맥명의 피난민과 군인들은 한강물에 휩쓸려 갔다. 100만의 서울시민들과 미아리 고개를 사수하던 군인들을 버려둔 채, 서울을 지키겠다는 정부의 약속을 믿으라던 녹음 방송 4시간 만에 수도 서울은 또 그렇게, 허무하게, 처절하게 무너졌다.

더 빨리· 더 멀리 도망가고 싶었던 조선의 선조, 도망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 한강 이남에 위치했던 한성을 나와 한강 이북 아차산에 나와 목숨을 걸고 고구려와 싸운 개로왕.

비참하게 죽은 개로왕은 역사에게 물을 지도 모른다.‘내가 저들보다 더 못나고 어리숙한 지도자 인가?’

오룡(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여성회관, 강남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