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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울림을 주는 시 한편-110

용인신문 창간 20주년에 부치는 편지


울림을 주는 시 한 편-110

- 용인신문 창간 20주년에 부치는 편지


‘당신’이라는 울림



당신에게 보낼 편지를 쓰다가 잠시 눈을 감기도 했습니다. 생활로부터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을 떠돌던 시절, 낯선 곳에 주저앉아 책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구절을 두세 번 눈길로 언더라인 한 후 갖곤 하던 버릇입니다.

한 여자가 전쟁터에 나가 있는 연인을 생각하며 영국 도버에서 띄워 보낸 유리병 편지가 바다를 건너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서 30년 후에 발견되었다는 글을 읽었을 때, 나는 ‘편지를 쓰는 일의 목적은 답장을 받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편지를 보낸 이도 받아야할 사람도 모두 죽고 난 뒤였습니다. 하지만 답장이라는 것이 어떤 모습으로 현현되든 간에, 누대에 걸쳐 그래왔듯이,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것입니다. 종이에 쓰인 간절한 마음이어도 좋고, 이마의 피를 닦으며 재림하는 메시아여도 상관은 없습니다.

이 편지는 출근 후, 당신에게 보낼 시를 다시 한 번 읽고 난 뒤 떠오르는 생각들을 적어 내려간 것입니다. 물론 사이사이 인터넷을 통해 메일을 검색하기도 했고, 읽다만 책을 잠시 펼쳤다 다시 접기도 했습니다. 아, 걸려온 전화를 받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짧게 한 번은 길게, 그렇게 두 번.

*

   
▲ (QR코드-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
지난 2008년 2월, NASA는 창립 50주년을 기념해 비틀즈의 노래 ‘Across The Universe’를 우주로 쏘아 보냈습니다. 노래가 궁극적으로 닿게 될 목적지는 작은곰자리의 북극성, 지구로부터 431광년 떨어져 있으니 빛의 속도로 전파가 날아가도 431년 후에나 이 노래가 북극성에 도달하겠지요. 음, 북극성에서 비틀즈의 노래를 듣고 바로 감상평이 담긴 답신을 보낸다고 해도 우리는 노래를 보낸 지 862년 만에 지구에 도달한 감상평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노래를 좀 더 듣길 원한다면 몇 년 정도는 더 늦춰질 수도 있겠지만.

당신에게 어떤 식으로든 편지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마음과 몸이 평온하고 또한 적적하며 숨 고르며 먼 길을 가는 일이 편지 쓰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쨌거나 떨림의 소인이 찍힌 마음 나도 어쩔 수 없어 이 ‘유치찬란한 방식’을 빌리기로 했습니다.
*

보이저 2호는 1977년 8월 20일에 보이저 1호는 같은 해 9월 5일에 각각 발사되었습니다. 두 대의 보이저 우주선은 태양계 내의 목성형 행성(대형 가스 행성)에 속하는 목성, 토성, 천왕성, 해왕성과 거기에 달린 48개의 위성, 고리구조, 자기장에 대한 탐사를 모두 마쳤습니다.

   
▲ (보이저1-2호에 실린,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2권 중 제1곡 전주곡과 푸가 다장조’
보이저 1호는 1998년 2월에 파이오니아 10호를 추월해 현재까지 발사된 우주선 중 가장 먼 거리를 날아가고 있습니다. 아시겠지만, 보이저호엔 금도금된 12인치 레코드판(The Sound of Earth)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구의 생명과 문화의 소리와 그림 그리고 도형 숫자 등과 55가지 언어로 된 인사말이 담겨 있습니다. 아, 글렌 굴드가 연주한 4분 48초짜리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 제2권 중 제1곡 전주곡과 푸가 다장조’가 실려 있습니다.

글렌 굴드, 살아서 홀로 외롭게 떠돌더니 그가 죽은 뒤 음악 또한 고독하게 암흑 속을 다니네요.

 

 

 

   
▲ 보이저2호의 모습.

현재 보이저1-2호는 태양계를 벗어나고 있습니다. NASA와 통신은 두절된 상태이고, 대략적인 위치는 태양계와 우주의 경계선인 헬리오시스(heliosheath)를 지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인간이 만든 물체 중 가장 멀리 비행한 것인데, 이동 속도는 시속 73,600km라고 합니다. 가출 치곤 좀 멀리 갔네요. 과연 내가 저 ‘보이저들’보다 외롭지 않다고 말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나마 당신 덕분에 고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2008년 여름, 장맛비가 쏟아지던 구로역에서도 나는 고요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부당 해고를 당한 기륭전자의 노동자들이 첨탑 위로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일 때, 난 그 밑에서 시를 낭송했습니다.

누군 첨탑 위에 올라가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데, 나는 그 밑에서 시를 읽었습니다. 아니, 시나 읽었습니다.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시를, 읽었습니다. 목에 자꾸 가시가 걸렸고, 잠시 그친 비가 다시 쏟아졌으면, 하고 바랐던 것 같기도 합니다.

고요하고 또 고독했습니다. 다시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광장에 섣불리 발 디디지 못했습니다. 아, 그게 시인의 한계입니다. 그게 나의 죄입니다.

*

황지우의 시 「꽃말」을 꽃처럼 꺾어 드립니다. 황지우 시인이 저 시를 쓰던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나라 언론은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옵니다. 독재자의 망령이 관을 쪼개며 되살아나려 기를 쓰고 있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영혼을 팔아가면서까지 노예로 살아가기를 자처하는 아주 웃기는 나라에 나는 살고 있습니다.

*

아직도 잊지 못하는, 조세희 연작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궤도회전」중 한 구절을 적으며 두서없고 형식 없는 글을 접을까 합니다.
‘난 몰랐어’라는 경애의 말에 윤호가 대꾸한다.
‘그게 너의 죄야.’

 

꽃말


황지우


식물학 교수 朴斗植씨(48)는 중병(重病)이라 했고,
의학협회 회장 李海萬씨(57)는 단순히 생리적(生理的)이라 했다.
우려스럽다고 하는가 하면
우려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도 했다.
민영방송 에므비씨 기자는 명륜동 대학가 앞 상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댄다.
푸른 안개 자욱한 춘계(春季)의 캠퍼스를,
적진(敵陳)에서 적진(敵陳)으로
보여준다. 노란 가래침을 뱉는 개나리꽃.
가정주부 安정숙씨(34)는 “불안해요”라고 말했고,
택시 기사 金상훈씨(42)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걱정된다고 했다.
누르기만 하면 스테레오 타이프 카세트테이프에서 말이 나왔다.
신문이 말하는 시계(視界)제로에 대해
치안본부는 절대로 고문한 사실이 없다고 발표했다.
고통의 배기통이 콱 막힌 버스가 급정거했다.
급격한 우회전은 승객의 머리를 좌경화시킨다는 걸 몰라요?
기회에 민감하다는 하마평(下馬評)을 받고 있는 한 온건론자는 말했다.
<중심의 상실>을 쓴 예술사학자 세들 마이어씨는
나치협력자였다.
4.19세대, 정부 여당 관념조정부장 金益達씨(44)는
수유리 묘소에 헌화했다. 대리석 속의 상한 이름들.
상채기에서 꽃잎을 밀어내는 진달래.
상흔은 치유를 위해서 있다는 말로 그는 기념사에 가름했다.
그는, 정치적 위생관념을 강조했고
이성(理性)을 강조했다. 비위생적인 것에 대한 대안은 주문제 식단이었다.
이성의 기념케이크 속에 방부처리된 이스트.
살아 있는 것은 모두 보균자였다.
주한 미군 사령관 스튜어드씨의 '들쥐' 발언은 사실과 다름이
공식적으로 밝혀졌고,
한국인의 의식을 도굴(盜掘)한, 의식의 고고인류학자 李言榮씨(52)는
일본 독자들이 더 좋아한다.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하고,
한국인은 누르면 눌린다고 누군가 말했었다.
보다 의심스러운 것은 배후였다.
불타는 부산 미문화원의 배후에 구경꾼들이 몰려들고
대다수의 다수는 구경꾼일 뿐이었다.
액션, 스펙타클과 서스펜스. 개봉박두. 이게 현대 한국정치사다.
미국무성에서는 논평을 거부했다.
다만, 20일자 사설이 ‘희망(希望)’, ‘헌신(獻身)’, ‘사랑’. ‘우정’의
꽃말에 ‘반공(反共)’, ‘친미(親美)’, ‘합의’, ‘단언’이라는 흰 팻말을
박았다.
자물쇠에 꽂힌 열쇠, 꽃말.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1985년)



- 박후기 시인 hoogiwoogi@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