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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타파-독립선언 33명중 절반은 변절했다

…오룡의 역사 타파(17)
1919년 3·1 운동의 33명 민족대표, 절반은 변절자 대표라 불러야 한다

1919년 1월 22일 경운궁(덕수궁)에서 뇌일혈로 고종이 세상을 떠났다. 소문은 소리없는 가운데 3천리 반도 곳곳으로 퍼졌다. 고종의 독살은 사실처럼(아직 그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단정짓지 못한다) 굳어졌다. 고종의 장례일인 3월3일에 예정된 만세시위는 이틀앞으로 당겨졌다. 2일은 일요 교회예배에 참석하는 민족대표들의 반대로(?)

3월1일 정오에 파고다 공원(현재의 탑골공원)으로 독립선언서 낭독장소는 예정되었다. 개학을 맞은 학생들과 고종의 인산일에 맞춰 상경한 일부의 유생들이 파고다 공원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예상하지 못한 군중이 모이기 시작한다.

소위 민족대표 33인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하기 시작한 것일까. 33명중에서 29명이 모인 시간은 오후1시 무렵. 태화관 사교 1호실에도 드디어 태극기가 걸렸다.

기본적인 의례를 마친 후 계획된 독립 선언서 낭독은 이미 보았다는 이유로 낭독되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기념 식사(?)가 이어졌다. 식사를 끝낸 손병희는 태화관 주인 안순환을 불러 조선 총독부에 집회 사실을 알리게 하였다.

1910년대 식민지 조선은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엄격히 금지된 무단 통치하에 있었다. 잠시후에 헌병들과 순사들이 인력거를 가지고 태화관에 왔지만, 민족대표들은 인력거를 정중히 사양하고 자동차를 요구한다. 택시 일곱 대가 도착해서야 이들은 태화관을 떠나 경무총감부로 이동했다.

요리집, 그것도 서울 최고의 기생들이 모여있던 태화관.

우리는 지금도 그곳을 파고다 공원과 더불어 3·1운동의 상징적인 곳으로 알고 있다.그렇다면 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으로 모인걸까? 그것도 천도교,기독교,불교를 대표하는 종교인들이 기생들의 분 냄새와 고량주 냄새가 진동했을 태화관에….

태화관은 원래 명월관의 별관 이었다. 현재의 광화문 동아일보사 근처에 있었던 명월관의 주인은 대한제국 순종의 요리사였던 안순환 이었다.

조선 병합의 일등공신들인 이완용과 송병준, 이지용 등이 단골로 드나들던 명월관은 궁중요리 전문이라는 수식어 보다는 내로라 하는 기생들 덕분에 성황을 이뤘다. 그 명월관이 1918년 불타 버린후 현재의 종로구 인사동에 태화관을 신장 개업한 것이다. 태화관에 자주 가서 식사를 했던 손병희의 여인(?)이었던 주옥경도 이곳의 기생이었다.

그 덕분에 독립선언서를 위한 조용한 장소로서는 아마 최고의 장소였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선택은 탁월했었나 보다. 흥분한 학생들과 군중에 의해 3·1운동이 확대될 것을 두려워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3·1운동의 주도자였던 최린은 1920년대 후반부터 신념에 찬 친일 인사로 활동했다. 그는 1942년 5월10일자 매일신보에 징병제 시행을 축하하는 글을 기고한다.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느냐… 반도 민중은 창씨도 하였고, 기쁜 낯으로 제국 군인이 되어 무엇으로 보나 황국 신민이 된 것이다”

민족대표였던 박희도는 1931년 1월에 친일 잡지 『동양지광』을 일본어로 창간하고 “조선이 자진하여 마음속에서 일본 국민이 되는 것이 가장 필요하다”고 주장한 것은 숱한 친일 활동들의 일부에 불과하다.

교과서에 실려있는 민족대표들이 3월1일에 항복(?)한 것과는 반대로 학생들을 비롯한 이땅의 이름없는 민중들은 선언서를 낭독하고, 유인물을 배포하며, 태극기를 흔들었다. 비폭력 만세운동에 대한 가혹한 탄압에 맞서기 시작하면서 7500여명이 죽고 수만명이 부상당한 가운데 4월말까지 2백만명이 참여한 3·1운동.

민족대표들이 대부분 2-3년만에 형 집행정지로 석방된 가운데 이 땅의 농민들과 학생들은 죽임을 당하고, 가혹한 수감생활을 하였다.

“폭동은 우매한 것으로 우리의 독립선언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만세운동과는 책임이 없다”라던 민족대표들의 재판과정 고백들이 형 집행 정지의 이유가 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그들을 3·1운동의 민족대표라고 가르치는 것은 바른 역사교육 인가?


오룡(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 회관, 강남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