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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씨의 전래와 조선 농민들의 무명옷 이야기

오룡의 역사타파

오룡의 역사 타파(19)

목화씨의 전래와 조선 농민들의 무명옷 이야기

1363년 공민왕 13년,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다. 그 후 일 년 만에 돌아 온 그에 의해 이 땅에 무명옷의 시대가 열렸다. 더 극적인 것은 삼엄한 국경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 붓두껍에 목화씨를 숨겨서 들여왔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려말과 조선초의 기록에는 ‘목화씨를 넣어가지고 왔다’거나 ‘그냥 가져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특히 고려사 열전을 보면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고려의 사명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에 부(附)하였다가 덕흥군이 패하므로 돌아왔는데, 목면의 종자를 얻어 와서 그 장인 정천익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거의 다 말라죽고 한 포기만 살아 3년 만에 크게 번식되었다.

씨 뽑는 기구와 실 빼는 기구도 모두 천익이 창제하였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목숨을 걸고 들여온 이야기는 없다.

왜, 목화씨의 전래가 붓두껍에 숨겨들여 온 목숨을 건 씨앗으로 바뀐 것일까? 이는 조선 중기이후 세금 제도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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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에 우리 땅에는 면직물이 없었을까. 당나라 역사서 한원(翰苑)에는 고구려가 백첩포(白疊布)라는 면직물을 생산했다고 나온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경문왕 때인 869년에 당에 보낸 선물 중에 백첩포 40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99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나온 백제 직물이 가장 우리 땅에서 오래된 면직물이라고 발표됐다.

문익점의 목화씨 이전에도 한반도 곳곳에서 면직물의 생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대목이다. 문제는 대량재배가 불가능한, 재배할 수 없는, 또는 재배할 필요성이 없는 품종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생산량이 작은, 생활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면직물을 위해 주식 작물인 보리와 벼, 조를 포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조선초기까지만 해도 목화씨는 농민들에게 매력 없는 작물이었을 것이다. 조세를 납부하기 위한, 먹고 살기 위한 벼, 보리의 재배가 더 중요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농민들에게 15세기 이후 군역을 회피하기 위한 방법으로 등장한 군적수포는 목화재배가 얼마나 중요한 사실인지 농민들을 깨우쳐 주었을 것이다.

15세기에 목화재배를 국가에서 규제해야 한다는 상소문이 올라온 것을 보면, 양반지주들의 위기의식이 그대로 표현된 것이다.

군대를 가지 않고도 먹고 살 방법이 목화 재배에 있다는 것을 안 농민들이 토지대장에 등록되지 않은 땅들을 개간하기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당연히 소작농사에 소홀해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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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TV 사극에 등장하는 조선전기의 농민들이 무명옷을 입는 것은 넋 나간 고증인 것이다. 16세 이상의 농민 남자들에게 군포 2필을 매년 납부하기 위한 노동의 강도를 생각해 보라. 가족 노동력으로 만들어야 하는 무명옷은 그들이 입을 옷이 아닌 세금마련을 위한 옷이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길이 16미터, 폭 33센티미터를 무명 1필로 정 한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후기 영조에 의해 실시된 균역법의 시행전까지 일반적인 농민들이 무명옷을 편하게 입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들의 옷을 만들기 위한 목화재배가 아닌 국가에 납부해야 할 세금을 마련하기 위해 목화를 재배한 조선 농민들이 겪은 고통이 미안해서 였을까? 목화씨를 가져 온 문익점의 목숨 건 이야기는 조선중기 이후 나타난 세금 수취와 관련된 조선 정부의 대국민 홍보용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붓두껍이 아니고 자루에 들고 왔다고 문익점의 노력과 재배를 위한 집념이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진정성이 정부에 의해 곡해되는 것이 더 위험한 폄훼이기 때문이다.

오룡 (평생학습 교육연구소 대표,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