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맑음동두천 22.1℃
  • 맑음강릉 17.8℃
  • 맑음서울 23.5℃
  • 맑음대전 24.7℃
  • 맑음대구 29.3℃
  • 맑음울산 21.8℃
  • 맑음광주 24.1℃
  • 맑음부산 20.3℃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1.4℃
  • 구름조금강화 19.4℃
  • 맑음보은 24.9℃
  • 맑음금산 23.4℃
  • 맑음강진군 24.4℃
  • 맑음경주시 22.6℃
  • 맑음거제 23.8℃
기상청 제공

고구려의 형사취수제는 패륜이 아니다

오룡의 역사타파

오룡의 역사 타파(21)
고구려의 형사취수제는 패륜이 아니다


‘우씨 왕후 - 두명의 왕과 결혼하다’

서기 179년 고구려의 고국천왕이 즉위했다. 그리고 일년 후 연나부 우소의 딸이라고 전해지는 우씨가 왕후에 올랐다. 강력했던 5부족의 반란을 진압한 191년, 고국천왕은 농부 출신 을파소를 등용하여 빈민 구제를 위한 진대법을 실시한다. 왕의 사랑은 물론 아이조차 낳지 못한 우씨도 친정의 몰락과 함께 권력의 정점에서 밀려나 버렸다.

그러던 그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고국천왕이 197년 갑자기 죽은 것이다. 왕이 죽은 그날 밤에 우씨는 궁궐을 몰래 나왔다. 고국천왕과 우씨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다음 왕이 누가 될 것인지 결정을 못한 상태였다.

이때 우씨왕후는 왕이 죽은 사실을 숨기고 밤에 고국천왕의 첫째 동생인 발기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왕이 되라는 암시를 한다. 발기는 왕이 죽은 줄 몰랐기 때문에 도리어 왕후가 밤에 자신의 집을 찾아오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고 했다.

우씨왕후는 부끄러워 발기의 집을 나와서 그의 동생인 연우의 집을 찾아간다. 연우는 복장을 갖추고 친히 문으로 나와 왕후를 맞아들이고 환대한다. 우씨왕후가 속마음을 털어놓자 연우는 그 뜻을 알고 응하여 왕후와 함께 궁궐로 들어간다. 다음날, 왕후는 거짓으로 고국원왕의 유언이라고 꾸며 신하들로 하여금 연우를 왕으로 모시게 한다. 그가 고구려의 산상왕이다.

이에 화가 난 발기는 전 왕족인 소노부 세력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왕궁을 쳤으나 패퇴하고 요동으로 건너가 공손씨(公孫氏)와 손잡고 고구려를 쳐들어 왔다. 이때 막내 계수는 형인 산상왕의 명을 받고 발기의 군대를 물리쳤다. 궁지에 몰린 발기가 “네가 이 늙은 형을 죽이려느냐”라고 소리치자 계수는 “연우 형님이 나라를 양보치 않은 것은 대의가 아니나, 그렇다고 한때의 분을 참지 못하고 나라를 전복하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 무슨 얼굴로 선인(先人)을 대하려 하십니까”라고 응수했다.

계수는 차마 발기를 죽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발기는 너무나 당당한 동생의 일갈에 잘못을 뉘우치고 제 손으로 목을 찔러 죽었다. 형의 죽음 앞에서 계수는 통곡하고 시신을 거둬 후히 장례를 치른 뒤 고구려로 돌아온다.

연우가 산상왕이 되고, 발기의 반란마저 진압하는 데는 우씨왕후와 그녀가 속한 연나부의 공이 컸다. 산상왕은 자신을 왕으로 만들어준 그녀를 놀랍게도 자신의 왕후로 삼았다. 즉 우씨왕후는 산상왕과 재혼을 한 것이었다. 우씨는 2대에 걸쳐 왕후가 된 것이다.

질투심과 권력욕이 강했던 우씨였지만 산상왕과의 사이에서도 자식을 낳지 못하고, 후궁의 아들이 동천왕으로 즉위하는 것을 봤으니…. 죽기 전에 남겼다는 유언이 삼국사기 동천왕 본기에 전한다.

“내가 행실이 바르지 못 했으니 이제 죽으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국양대왕(고국천대왕)을 뵈올 수 있으랴. 나를 미워하여 시체를 그냥 구덩이에 버리지만 않고 묻어주겠다면 선제(산상왕)의 능 옆에 장사 지내주기 바라노라.”

우씨가 죽은 뒤 유언대로 산상왕릉 곁에 장사지냈더니 이튿날 신관(무당)이 동천왕에게 이렇게 아뢰었다. 고국천왕께서 나타나셔서 “우씨가 산상왕에게 가는 것을 보고 내 분함을 참을 수 없어 우씨와 대판 싸웠노라! 돌아와 곰곰이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 나라 사람들을 볼 수가 없으니 이 일을 어쩌랴? 네가 조정에 일러 무엇으로든 나로 하여금 우씨와 산상왕의 꼴을 볼 수 없도록 막아 달라”고 하셨다고 전했다. 이에 고국천왕의 능 앞에 소나무를 일곱 겹으로 심어 산상왕릉 쪽이 보이지 않도록 가렸다.

우리 역사 속에 유일한 형사취수혼의 왕비로, 시기와 질투로 아름답지 못한 삶을 보냈을 여인으로, 죽는 순간에도 묘자리를 걱정했고 죽은 후에도 외로웠을 우씨왕후. 안정복의 <동사강목>을 비롯한 조선시대에 쓰인 역사책들에 의해 저주에 가까운 비난을 받는 그녀의 결혼이 조선시대 가치관에서는 비난받아야 했지만 고구려에서는 자연스러웠다. 형사취수, 결혼의 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오룡 (평생학습 교육연구소 대표,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