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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은 성공한 작전이었나?

오룡의역사타파

오룡의 역사 타파(22)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은 성공한 작전이었나?


대마도(일본명 쓰시마). 부산에서 거리가 49.5㎞인 반면 일본 큐수의 후쿠오카에서는 134㎞나 떨어진 섬이다. 섬 면적의 90% 이상이 산악지대여서 고구마를 제외하면 먹을 것이 거의 없는 척박한 땅이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한 이들은 해적과 왜구라고 불리우며 동아시아의 해안주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고려말부터 계속된 왜구의 준동은 조선초기에도 계속된다. 일본 본토의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교체기의 혼란도 원인이었다.세종 1년(1419) 5월, 왜선 500여 척이 서천 비인현을 침공했다. 당시 태종은 왕위는 세종에게 넘겨줬으나 병권만은 장악하고 있었다. 상왕 태종이 주상 세종에게 말했다.
“주상, 지금 적들이 발광하고 있는 비인현에서 싸울 게 아니라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가 비어 있으니 그곳을 치도록 하시오.”

세종은 즉시 이종무를 삼군도제찰사로 임명하여 전함 227척, 군량미 65일분, 병사 1만7000명을 통솔하여 대마도 정벌을 명한다. 기습 작전으로 인한 대마도 공략은 대성공이었다. 정벌을 통해 대·소 선박 129척과 가옥1940여 호를 소각하고 적 114명을 참수하는 대승을 거뒀다. 21명의 왜구를 생포하고 중국인 포로 131명도 구출해 냈다. 허를 찔린 비인현의 왜구는 내륙군의 협공으로 순식간에 괴멸되고 말았다.

이종무 장군이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 포함된 연유도, 역사교과서에 대마도 정벌이 실린 까닭도 ‘대승’ 때문이다. 그러나 국사책에서 언급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조선왕조 실록 세종 1년 8월 16일자를 보면 의금부 제조 변계량 등이 수강궁에 가서 아뢰기를,“어제 명령을 듣고 박실의 패군한 죄를 국문하오니, 실이 공술하기를,‘이종무가 처음에는 삼군 삼절제사에게 명령하여, 다 육지에 내려서 싸우라고 하더니, 뒤에 명령을 변경하여, 삼군 절제사 각 한 사람만이 육지에 내리라고 하여서, 실이 제비를 뽑게 되어서 내렸던 바,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여서, 두 번이나 보고하여 구원하기를 청하였으나, 종무가 들어 주지 아니하고, 유습과 박초 등도 역시 내려와 구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패전하게 되었다. 하오니, 신들의 생각에는 특별히 박실의 죄뿐이 아니고, 종무와 습과 초도 다 유죄하오니, 모두 국문함이 옳은가 합니다.”

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박실의 패군한 죄는 모두 다 아는 바이지만, 만약 법대로 논한다면, 유정현이 도통사가 되어서 즉시로 실을 구속하고 벌을 줄 것을 청하지 아니하였으니, 그것은 역시 죄되는 일이므로, 이제 장온을 무고죄로 벌주고, 여러 장수들을 상주었다가, 또 다시 정현과 종무를 옥에 하옥한다면, 나라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이 있지 않겠는가. 하물며 동정할 때에는 승리가 많았고 패전은 적지 않았는가. 뒷날의 일도 역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 만약 대거(大擧)할 계획을 한다면, 또한 권도(權道)를 써야 할 것이나, 내 어찌 그런 일로 하여, 끝까지 그 죄를 치죄하지 않을 수야 있겠는가. 이제 실은 공신의 자식이라 하여, 면죄시키게 하라.”

사실, 이종무의 초반 승리는 왜구들이 기습을 당했기 때문이며 그는 왜구들이 재정비하여 반격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전 부대를 상륙시키지 못한 것이다. 주력부대는 그대로 배에 둔채 부대하나만 보냈다가 전멸을 당했는데 그 부대가 좌군절제사 박실이었다.

사기가 떨어진 이종무는 주력함대를 이끌고 거제도로 철수하고, 태종은 병조판서 조말생으로 하여금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내도록 했다. 대마도주의 항복을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돌아와 개선장군으로 대접받았으나 며칠이 안되어 탄핵됐다.

이후에도 왜구들의 공세는 전혀 줄지 않았고 조선군은 재차 출병했다.(실록에서는 단지 갔다 왔다고만 기록했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해안방비도 강화된다. 대마도의 왜구가 완전 토벌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마도가 경상도에 복속되었다라는 것은 이후에 대마도주가 식량부족으로 인해 조선에 복속을 요청했고 조선은 형식상 대마도를 조선으로의 복속을 허용한다. 이는 형식적인 것으로(명과 조선과의 사대 책봉관계와 유사) 조선의 관리가 파견되어 행정권, 사법권을 행사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독도영유권 문제가 있을 때 마다 대마도도 우리땅이라며 근거로 삼는 이종무의 대마도 정벌, 논리적 근거로 삼기엔 미흡하다. 역사는 감정의 문제로 해결 되는 것은 아니다.


오룡(평생학습 교육연구소 대표,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