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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환과 이완용

삶의 출발은 비슷했으나 마지막은 달랐다

오룡의 역사 타파(23)


삶의 출발은 비슷했으나 마지막은 달랐던 민영환과 이완용



신문에 실려 인구에 회자된 <혈죽가>에서는 “놀랍고도 신긔하다 우리 민충정/ 어리석고 블상하다 우리 국민들(…)/ 대한 중흥 어서 해보셰”라고 하여 사후에 기적을 일으켰다는 민영환을‘어리석고 불쌍한 백성’의 스승으로 삼았다.

나라가 무너져가는 시대에 자살이라는 소극적 형태로라도 저항을 보인 민영환은 친일하거나 보신주의로 일관한 다수의 고관대작과 대조적으로 군계일학처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민영환 영웅 만들기에 앞장섰던 <대한매일신보>등 매체들이 절대 언급하지 않았던 사실도 있었다.

임오군란의 원인 제공자로, 민씨정권 부패의 상징으로 군란의 와중에서 피살된 민겸호(1838~82)의 아들 민영환. 22살의 나이로 벌써 정3품의 성균관 대사성(국립대학 총장)이 되고 그 뒤 30살도 채 되지 않아 이조참판•호조판서•병조판서까지 두루 역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가 척족정권의 핵심적 소장 멤버라는 태생적 신분이 있었던 것이다.

전봉준(1854~95)의 공초에는 민영환이 매관매직•부정부패의 주역으로 지목되고 있다. 어느 정도가 사실인지 지금 확인할 길이 없지만 1890년대 전반에 민영환이 매관매직을 주관한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았던 만큼 전혀 사실무근은 아니었을 것이다.

민영환의 중요한 공적으로 러시아와 유럽 각국, 일본 등지를 무대로 한 외교 활동이나 독립협회 등 개화파 조직들과 (민씨 척족으로서 이례적인) 가까운 관계 등의‘개방성’을 들지만, 러시아·일본 양쪽과 거리를 두고 미국의 도움에 의존해야 한다고 주장은 필연적인 실패의 외교였다.

미국에 의존하려는 것은 러·일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려 했던 고종과 측근의 바람이었지만 이미 일본의 손을 들어준 미국이 민영환과 고종의 밀사로 1904년 말 도미한 이승만의 애원을 들어줄리 만무했다.

비슷한 시기 이완용의 초기 모습도 민영환과 비슷하다. 명문가 양자로 들어가 최초의 근대식 교육 기관이었던 육영공원에서 공부한 그는 주미공사관을 시작으로 독립협회 위원장, 아관파천의 실질적인 주동자로 권력의 정점에 있었다.

친미파 • 친러파•친일파로 바뀌었으며 1905년 학부대신이 되고, 11월18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지지, 솔선하여 서명함으로써 을사 5적신의 한 사람으로 최악의 매국노가 되었다.

이후부터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을 받아 의정대신 서리·외부대신 서리를 겸직, 1907년 의정부 참정이 되었으며 의정부를 내각으로 고친후 총리대신이 되었다. 1907년 헤이그 특사 사건이후로 고종에게 책임을 추궁하고 양위할 것을 강요하여 기유각서를 단독으로 맺어 대한제국의 사법권마저 일본에 넘겨주었다.

군중들에 의해 집이 불타고, 명동성당 앞에서 이재명의 칼을 맞았지만 목숨을 건졌다. 1910년 8월 29일 총리대신으로 정부 전권위원이 되어 일본과 한일 병합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에 의해 백작,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후작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도 일본으로 부터 남작의 지위를 받았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대의 실리를 추구하기 위해 죽는 순간까지 변신을 거듭하며 69살까지 살다간 이완용은 영원히 죽은 인물이다.

44살의 민영환, 고종에 대한 충성심을 강조한 자결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에게 나라를 지키지 못한 사죄를 하고 죽었기에 역사속에서 살아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오룡

(평생학습 교육연구소 대표,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