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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택한 마지막 승부수, 영원한 충신의 자격(?)을 얻은 포은 정몽주

오룡의 역사타파

오룡의 역사 타파(24)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모르는 이 없을 시조다. 옛 선인들에게 글이 그의 사람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본다면 단심가는 정몽주를 대변한다. 뛰어난 정치가였던 정몽주의 시조 한편을 통해 절대적 신념과 훼절할 수 없는 가치의 정립을 발견한다.

그래서 그의 죽음 앞에 충절의 상징성을 부여한다. 거기에 극적인 장치들이 더해진다.

훗날의 태종 이방원이 포은의 마음을 엿보고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서 백년까지 누리리라’의 하여가와 대비되는 타이밍의 절묘성이다. 자객 조영규의 쇠몽둥이로 선죽교에서 절명하는 장면은 비장미의 절정이다.

개성에서 죽은 포은은 1406년 태종6년에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을 허락 받았다.용인 수지 풍덕천 근처에 이른 행렬의 명정(銘旌)이 날아가 떨어진 자리에 묘지를 삼았으니 현재의 모현면 능원리다.

1337년에 태어나 1360년(공민왕 9년)에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본격적인 관리의 길을 걸었다. 당시의 대학자 이색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한 정도전과는 뜻을 함께하며 권문세족과 대립하며 개혁적인 정책들을 펼치기도 한다. 또한 이성계의 여진족 토벌 당시엔 종사관으로 종군하며 우의를 나누기도 했다.

명나라의 철령위 요구에 전쟁을 주장하는 최영파와 외교적 방법으로 해결하자는 이성계파가 나뉘었을 때 정몽주는 이성계파와 의견을 함께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성계가 우왕을 폐할 때도, 최영을 처형할 때도 뜻을 같이했다.

공양왕을 세운 공으로 승진하고 공신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성계를 왕으로 세우려는 움직임이 분명해지자 더는 같은 길을 갈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고려를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은 같았고, 왕을 폐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급진적인 성향도 다를 바 없었지만, 고려왕조는 지켜야 한다는 게 정몽주의 신념이었다. 역성혁명을 꿈꾸는 이성계와 정도전은 이제 그의 정적이 되었다.

왜 그는 이토록 잘나가던 상황에서 급진개혁파에게 등을 돌렸을까? 그가 반 이성계를 분명히 한 시기는 1391년 과전법의 시행 이후이다. 조준의 과전법 발표후 이성계 세력을 제거하고자 모든 정치력을 기울였지만 실패한다. 결국 1392년 4월4일 정몽주는 이방원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과전법을 기초한 것은 조준이지만 중요한 설계자는 정도전 이었다. 일반 농민들에게 기본적인 토지를 지급해야 한다는 논리는 나라를 세우는 것 보다 더 혁명적인 생각이었다. 배우지 못한 농민들이 일하기 싫어 유랑하다는 생각을 가진 다수의 집권층들에게 농민안정을 위한 과전법은 또 다른 가치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몽주는 조선건국 세력들에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이유만으로 그는 고려의 충신이 되었다. 그가 보여준 점진적 개혁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목숨을 걸고 마지막 승부수를 통해 그 조차도 버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포은(圃隱)이란 호가 몸을 피할망정 뜻은 굽히지 않는 은둔사상과 은사(隱士)들의 신념이 내포된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정몽주가 죽은 뒤 13년이 지난 1405년, 태종 이방원은 정몽주를 영의정에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에 추봉했으며,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고려 정몽주의 충절은 신앙으로 남았고, 그의 학문과 이념은 조선의 사림파에게 이어졌다.

현실에서 포은을 이긴 급진파 삼봉 정도전이 태종으로부터 조선왕조 500년간 역적으로 남겨지고, 포은 정몽주가 충신의 대명사로 불리워지는 것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일 수 있다면 지나친 것일까.

오룡 (평생학습 교육연구소 대표,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