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구름조금동두천 25.7℃
  • 맑음강릉 20.7℃
  • 맑음서울 26.3℃
  • 맑음대전 28.8℃
  • 맑음대구 31.2℃
  • 맑음울산 23.9℃
  • 맑음광주 28.4℃
  • 맑음부산 23.8℃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2.0℃
  • 맑음강화 22.7℃
  • 맑음보은 27.6℃
  • 맑음금산 27.3℃
  • 맑음강진군 28.5℃
  • 맑음경주시 28.3℃
  • 맑음거제 26.8℃
기상청 제공

고려, 몽골과 30년을 맞짱뜨다

그 중심에는 처인성의 김윤후가 있었다

오룡의 역사 타파(26)

고려- 몽골과 30년을 맞장뜨다, 그 중심에는 처인성의 김윤후가 있었다

“태종 4년 8월, 다시 살리타이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고려를 정벌케 청했는데, 왕경 남쪽에 이르러 처인성을 공격하던 중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원사]“몽고의 원수 살리타이가 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이를 사살하였다.” [고려사]

1232년 12월 16일, 질풍노도처럼 내달리던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이가 죽었다. 30여년간 대 몽골전쟁 최대의 승전은 고려의 정규군이 아닌 이름없는 부곡민과 승려 김윤후가 만들었다.

몽골군의 제 2차 침략이 벌어질 당시, 대칸 오고타이는 금나라 정복에 마지막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살리타이는 아마 고려의 북방이나 그곳에서 멀지 않은 요동 지역에 주둔하고 있다가 출병했던 것이 아닐까? 만약 그가 금나라 정복에 참전하고 있었다면 지리적인 위치상 고려에 대한 원정을 다시 개시하기는 어려웠을테니 말이다.

2차 침략은 고려의 주요 거점에 대한 공격을 감했했다. 1차 침략이 충주와 청주였음을 감안하면. 대구까지 내려온 몽골군은 팔공산 부인사에 소장된 대장경판을 불태워 버린다. 팔공산에는 공산성이 있는데, 몽골군은 아마 이 공산성을 공격하면서 인근의 부인사를 약탈, 방화하면서 대장경판을 불태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소실된 대장경판은 고려 현종 때 요나라 침략군과 싸우면서 조판한 것이었다. 이 대장경판을 대신해 새로 만든 것이 우리가 잘 아는 팔만대장경이다. 대구까지 내려간 몽골군은 본대가 아니라 선발대였다. 그것은 살리타이가 그해 12월 처인성 전투에서 전사하자 더 이상 내려가지 못하고 철수했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몽골군은 내려오면서 이미 천도하여 텅 빈 개경을 거쳤고 이때, 살리타이는 배를 만들어 직접 강화도를 칠 계획도 세웠다. 이것은 변여라는 사람을 사로잡아 심문하면서 강화도로 가는 수로와 뱃길을 물었다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살리타이는 이를 포기하고 만다. 이후의 침략에서도 몽골군은 강화도를 직접 공격하지 않는다.

강화도는 너무나 가까워 수전을 치를 것도 없는 섬이고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는 곳인데도 말이다. (실제로 나중에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청나라 군대는 너무나 쉽게 바다를 건너 강화도를 점령했다.

몽골이 유목 민족이라서 해전에 약하다고 하나 일본원정을 두 차례나 보내고 자바(지금의 인도네시아)까지 2만의 군대를 보냈다) 몽골군은 왜 강화도를 직접 정복하지 않았던 것일까. 개경에서 계속 남진하여 한양산성(서울)을 함락시킨 후, 광주산성 함락에 실패한 살리타이는 경상도 방면으로 진격하기 위해 남진하다 처인성에서 저항을 받는다.

처인부곡은 당시 수주(수원)의 속현이었다.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처인 부곡민들은 모두 처인성으로 피난 와 있었다. 이곳에서 몽골군과 공방전이 벌어지던 중, 살리타이가 화살에 맞아 죽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가 1232년 12월 16일이었다. 고려사에는 화살로 살리타이를 맞춘 것으로 전한다. 그런데 드라마 <무신>에서는 칼싸움 끝에 목을 벤 것으로 묘사했다. 실록에 내용이 없다면 드라마 작가의 상상이라 할 수 있지만 너무 과한 설정인 것만은 분명하다.

고려사 열전을 보면 김윤후는 고종 때 사람이다. 일찍이 승려가 되어 백현원(白峴院)에서 살았는데, 몽골군이 쳐들어오자 처인성으로 피난갔다가 살리타이가 와서 성을 공격하자 김윤후가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 왕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으로 임명하였으나 김윤후는 “전투할 때 나는 활이나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무거운 상을 받겠는가?” 하고 사양했다.

김윤후가 거부한 상장군의 공로는 처인부곡의 하층민들에게 처인현 승격으로 대신했다면 지나친 확대 해석일까. 김윤후에게 용인은 참 많은 신세를 지고 있는 것 같은데, 처인성 위치가 아직도 논란이라니 유감스럽다. 오룡
(평생학습 교육연구소 소장,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