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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기록은 승자의 전유물이다

오룡의 역사 타파(29)

   
▲ 정림사지 5층석탑

망국의 백제 수도 사비성에 남겨진 쓸쓸한 낙서(?) - 정림사지 5층석탑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그러나 후대에 이어질 기억마저 모조리 차지하지는 못한다. 진 자는 가물가물한 기억의 힘으로 살아남는다. 그 흔적인 문화유산앞에 서서 그 아련한 역사를 보노라면 감정은 오롯해진다.

전통석탑의 백미라고 하는 부여 정림사지 5층석탑. 푸른 하늘을 향해 날렵한 지붕돌 끝의 쳐들린 선이 너무나 아름다운 백제의 탑이다. 그 아름다운 백제 장인의 솜씨에 낙서해 놓은 (1층 탑신부에 660년 백제 멸망 당시 당나라 장수 소정방의 명으로 새긴‘대당평백제국 비명’)은 망국의 나라 백제의 아픔, 우리의 아픔을 처연하게 표현해 주고 있다.

숱한 양민들을 살상하고 사비성 안의 궁성과 사찰을 불지른 소정방은 전과에 고무되어 공훈비를 새기기로 한다. 불에도 타지 않는 화강암의 5층 탑에 문사 권회소를 시켜 글자를 새긴다. 내용을 보면 출정한 중국 장수들의 공덕을 치켜올리고 잡아간 왕족, 백성과 정복한 땅의 내력을 자랑스럽게 적고 있다.

끝간 줄 모르는 이국 장수의 기고만장함이 느껴진다. 글의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반도의 오랑캐가 만리 밖에 떨어져 천상을 어지럽게 하고 정사를 그릇되게 하여 백성이 원망하니 우리 황제가 형국공 소정방으로 하여금 원정케 하였으니… 형국공이 일거에 삼한을 평정하였다. 부여 의자왕과 태자 융과 도독, 37주 250현을 두었고 호수는 24만, 인구 620만…”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인근 청양의 지방관인 금정 찰방으로 부임했던 시절 정림사탑을 답사하고 평제비문 글씨를 뚫어지게 관찰했던 듯하다. 훗날 자신의 시문집에서 “평제탑 기록이 공적을 대단히 과장해서 찬양했다”며 “중국의 일 벌이기 좋아하는 호사자(好事者)들에게 준다면 반드시 진귀하게 여겨 아끼고 애완할 것”이라고 비꼬았다. 그가 남긴 ‘소정방의 평백제탑을 읽고(讀蘇定方平百濟塔)’란 제목의 한시 또한 백미라고 일컬을 만하다.

‘벌레먹은 잎처럼 흐릿한 글자획/새 쪼은 나무마냥 어지러운데/ 이따금 이어진 네댓 글자는/ 문장 조리 훌륭하구나/ 대장 도량 넓음을 거론하였고/ 빨리 이룬 무공을 과시하였네…개선 노래가 강 고을을 진동할 적에/ 만백성은 엎드려 있고/ 많은 돛배 바다로 돌아갈 적에/ 그들 사기 온 누리 충만했으리/ 승리는 한때의 기쁨이며/ 패배 역시 한때의 치욕일 따름일 터/ 지금 탑은 들밭 가운데 놓여 / 나무꾼 소몰이꾼들 주위 맴도네’

정림사지 5층석탑은 기단이 1층 지붕돌보다 폭이 좁고 지붕돌 또한 처마 끝이 치켜올라가 날씬하고 역동적인 느낌을 준다. 현재 학계에서는 가장 조형성이 돋보이는 탑으로 평가하지만 불과 반세기 전에는 정말 별볼일 없는 탑이었다.

망국의 고도에 폐사지로 남은 곳에 덩그라니 세워진 이름조차 없었다.(백제당시의 이름이 아닌 1942년 후지사와라는 일본 학자가 절터를 발굴하면서 찾은 기와에 정림사란 고려시대 사찰명이 발견되어 지금 이름을 갖게 됨) 때문에 70년대 초까지만 해도 평제탑이라고 부르는 것에 익숙했던 탑이었으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으며, 우아하지만 화려하지 않은 정림사지 5층 석탑의 진정한 가치는 승자가 남겨놓은 오만무도한 기록 때문에 돋보이는 것은 아닐까. 대통령 임기중에 보여주고자 한 엄청난 공사와 막대한 예산을 들인 4대강과 경인 아라뱃길은 자연을 파헤친 불경스러움이 곳곳에 남겨져 있다니 이는 우리 후손들에게 어떤 유산으로 보일 것인가?

오룡(평생학습 교육연구소 소장,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