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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시아의 역사전쟁(?)은 현재진행형 이다

오룡의 역사 타파(32)

   

-잃어버린 간도, 사라져 버린 백두산 정계비-

조선의 심마니는 산삼을 찾는데 청나라 인들보다 감각적(?)으로 탁월했다. 특히 만주 지역과 백두산 일대에서 청나라 인들과 마찰을 일으키는 일이 빈번했다.이러한 사실은 만주족인 청의 강희제에게 심각한 문제였다. 고향인 만주지역에 대한 오랜 봉금 정책으로 일관했던 청나라는 국경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1712년 청은 국경선 실측을 제의해 왔다. 조선에서는 예조참판인 박권을 접반사로 삼고 함경감사 이선부와 현지의 수령, 군관 등을 동행케 했다.  

두 나라 대표는 실측을 위해 혜산진에서 백두산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이때 박권과 이선부는 힘이 부쳐 가지 못했고, 군관과 통역관만 백두산에 정상에 올랐다. 오라총관 목극동은 천지의 남쪽 비탈에 이르러 경계를 표시할 지점을 지정했다. 일방적인 결정이었다. 하지만 목극등은 정계비에 두 대표 이름을 새겨야 하는 형식 요건이 필요했다. 목극동은 무산으로 내려와 박권과 상의하여 두 강의 상류에 목책과 흙과 돌을 쌓아 경계를 표시하자고 합의했다. 그 경비는 청에서 부담하고 작업은 우리 쪽에서 맡기로 했다.  

 

   

 

정계비를 설치한 곳은 함경북도 무산군 삼장면으로 해발 2200m 지점이다. 백두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4㎞쯤 내려온 곳이다. 그 비문은“오라총관 목극동이 황제의 지시를 받들어 변경을 조사하려 여기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압록강이 되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토문강이 되기에 분수령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해 둔다”이다. 그런데 끝에 박권의 이름은 빠지고 대신 군관과 통역관의 이름만이 병기되었다.

비석에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토문강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한 갈래는 송화강 상류인 이도강으로 합류하는데 이를 청나라 사람들은 토문강이라 부른다. 토문강을 경계로 할 경우 바로 토문강 남쪽에 해당하는 북간도 일대는 우리 영토가 되는 것이다. 목극동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이 경계 표시로 목극동은 처벌을 받았다.

하지만 현지에 살던 이들은 토문강과 두만강을 구분해 불렀으며 바로 토문강을 두 나라 경계로 여겼던 것이다. 한편 청나라 사람들은 두만강을 도문강(圖們江)이라 불렀다.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한 뒤에 백두산 정계비는 아무도 관심없는 돌기둥에 불과했다. 백두산을 등반하는 사람들이 보고가는 정도였을까.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이 1932년 만주국을 세우고 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 선통제를 만주국의 책임자로 임명한다. 그리고 나서 정계비는 사라졌다. 일본은 만주와 조선의 국경을 정해놓은 과거의 기록을 지우고 싶었을지 모른다.

대동아 공영권을 내세우며 일선동조와 내선일체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군국주의 일본에게는 지워야할 비석이었다. 하지만 지울 수 없는 것은 사진과 기록이 아직 존재하고 그 탁본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간도협약(1909년)으로 청의 영토로 인정해 준 일본이 과거의 기록을 지우기 위해 백두산 정계비를 치웠다면, 지금쯤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조선과 부여, 그리고 고구려 마저 자국의 역사라고 하지 않을까.

중국을 방문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나서도 해결할 수 없다면, 말할 수 없다면…….간도는 현재 진행중인 우리의 역사이기에 버려서는 안될 것이다.

오룡
(평생학습 교육연구소 소장,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