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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망가진 역사를 아직도 사용하는 우리

오룡의 역사타파

오룡의 역사 타파(33)

일제에 망가진 역사를 아직도 사용하는 우리
장충단과 신라호텔, 경운궁과 덕수궁-역사는 말이 없다

‘안개낀 장충단 공원 누구를 찾아왔나/ 낙엽송 고목을 말없이 쓸어안고 울고만 있을까’로 시작되는 대중가요 안개낀 장충단 공원.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가수 배호의 중저음과 어울려 애수에 잠들게 한다.

1900년에 5군영인 어영청의 분원인 남소영 자리에 장충단이 건립됐다. 1985년 을미사변 당시에 일본 낭인들과 싸우다가 죽은 훈련대 홍계훈과 궁내부 대신 이경직을 비롯한 군인들을 기리는 제단이었다. 1901년에는 개항이후 순국한 영령들을 추가하여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오늘날의 동작동 국립현충원과 비슷한 곳이다. 장충(獎忠)은 충성을 장려한다는 의미이며 현충(顯忠)은 충성을 드러낸다는 뜻이다.

1904년 선전포고도 없이 일본은 러시아를 기습공격하고 서울에 대규모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만주로 가기위한 일본군들의 오락장을 짓기 위해 일본인 거류민단은 장충단 서쪽지역을 매입하여 ‘유곽’을 만들었다.

헐값에 강제로 사들인 곳이 대한제국의 초혼단이었던 장충단 주변이었다는 것은 일제의 의도적인 대한제국의 정신 말살이라 볼 수 있다. 일제는 고종이 죽은후에 장충단을 공원으로 만들어 버리고, 1932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지었다.

박문사의 정문은 경희궁 흥화문을, 부속건물은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영정을 봉안하던 경복궁 선원전 건물을 옮겨다 사용한다. 장충단 서쪽에는 군인들의 유흥장을, 동쪽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축원하는 박문사를 건립한 목적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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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울에서 걷기 좋은 길을 선정할 때마다 덕수궁 돌담길이 우선 순위에 오른다. 혜은이가 부른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의 아련한 추억도 함께 하는 멋스러운 길이다.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불탄 궁궐을 대신하여 선조가 1593년부터 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611년 광해군이 경운궁으로 불럿지만 창덕궁을 법궁으로 사용하던 시기에는 주목받지 못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한 고종은 아들인 순종에게 창덕궁을 내주고 결국 여러 사연 끝에 이사한 곳이 경운궁 이었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쫓아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덕을 쌓으며 천수를 누리시라’는 의미로 궁궐 이름을 덕수궁으로 변경했다.

덕수궁의 원래 뜻은 ‘퇴위한 왕이 거처하는 궁’이라는 의미의 보통명사인데 일제는 보통명사를 궁궐 이름으로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장충단 자리에 들어섰던 유곽과 박문사는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신라호텔이 들어섰다. 몇해전 한복 입은 사람의 식당 출입을 금지한 호텔에 대해 여론의 질타가 대한제국의 역사까지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고객에 대한 배려 차원이라 했다지만 호텔 위치의 역사지식을 호텔의 관계자들이 알았더라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이 자랑하는 궁궐의 이름이 쫓겨난 고종을 조롱하던(?) 보통명사의 의미로 사용된 것인데도, 우리는 그 길을 걷고 싶다고 난리다.
오룡(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강남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