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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 역사, ‘해방’과 ‘광복’

오룡의 역사 타파(34)

‘종군 위안부’와 ‘조선인 일본군 성노예’

1945년 8월15일. 해방(解放)의 기쁨은 만세로 표출됐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거리로 뛰어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광복(光復)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해방의 사전적 의미는 구속, 차별, 속박,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또는 그 상태를 말한다. 광복은 빛을 되찾음 또는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1910년 8월29일 대한제국이 빼앗긴 국권과 1945년 8월15일 다시 찾아 온 국권의 의미가 지닌 차이는 있는가. 1945년 8월15일부터 1948년 8월15일까지 미군정의 지배를 받은 우리의 진정한 국권회복 시점까지 묻는다면 혼란스러워 진다.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우리 역사와 한반도 진출이라는 일본 우익들의 시각 차이만큼 역사 용어의 어휘 사용은 신중해야 한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과 해방 3주년 기념식을 함께한 역사적 기록을 보면 광복 68주년 기념식 문구도 올바른 표현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1970년대까지의 신문과 방송은‘해방공간’이나‘해방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의 단원 제목에도 ‘민족의 해방과 국토의 분단’이라 썼다. 물론 이승만 정권이 4대 국경일을 정할 때 광복절로 불렀지만 국민들에게‘해방’이 친숙했다.

이런 분위기가 바뀐 것은 1980년대 5공화국이었다. 5월 광주의 비극을 저지르고 태생적 한계에 봉착한 전두환 정권에게 학생과 재야 인사들이 쓰던‘해방’은 눈에 거슬렸다. 때마침 북한은 정치적 의도와 선전의 도구로‘남조선 해방’을 즐겨 사용하고 있었다. 8월15일을‘민족해방 기념일’이라고 칭하고 있었으니,‘보도지침’은 스스로 알아서 길들여지는 언론을 만들기에 충분했다.

*

‘정신대’와 ‘종군위안부’를 오가던 표현들이‘조선인 일본군 성노예’를 쓰기 시작했다. 물론 일본 정부가 인정한 표현은 아니다. 문제는 우리 내부에도 이 문구 사용이 잘못 됐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주장을 보면, 조선총독부나 일본군이 위안부를 직접 모집했다는 사료의 불충분성과 위안부는 다국적인들로 구성되어 조선인만 차별받았다는 근거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또한 직업적인 성매매 여성들로 구성된 위안부가 상당수 있기에 일본의도의적인 책임이외에 직접적인 사과와 배상의 문제는 별개라는 입장이다.

거대 권력인 조선총독부와 일본군의 폭력적이고 조직적인 행위보다 성매매의 비인도적이고 반이성적인 문제임을 부각시켜 쟁점을 흐리고 있는 것이다. 문서로 확인된 사료가 거의 없다는 것, 직접 지시나 명령의 근거가 남아 있지 않다는 것보다 당사자들의 생생한 증언만큼 확실한 것은 없을 것이다.

권력이 저지를 범죄적 행위들이 증거를 남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잘못을 저지른 자들이 스스로 사죄하고 반성하는 경우도 많지 않다.

‘해방’과 ‘광복’처럼 충분한 증거가 있어도 다시 쓰기 어렵다. 그렇다면 충분한 사료가 없다고 주장하는 마당에 유일한(?) 증언자들인‘일본군 위안부’피해자들이 사라진다면…. 그들은 이제 57명만이 생존해 있을 뿐이다.

오룡(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강남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