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구름조금동두천 20.7℃
  • 맑음강릉 16.9℃
  • 구름조금서울 21.8℃
  • 맑음대전 22.4℃
  • 맑음대구 24.3℃
  • 맑음울산 20.1℃
  • 맑음광주 22.5℃
  • 맑음부산 19.2℃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0.8℃
  • 구름많음강화 18.7℃
  • 맑음보은 22.7℃
  • 맑음금산 21.7℃
  • 맑음강진군 23.2℃
  • 맑음경주시 20.0℃
  • 맑음거제 22.6℃
기상청 제공

오! 불쌍하다 '시일야방성대곡'의 장지연 그리고 김구 암살범 안두희

오룡의 역사 타파(36)

교과서에서 처음 만나는 인물들은 기억에 오래 남는다. 인물은 아니지만 최초의 인류인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를 한국인 대다수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을사늑약 하면 ‘을사오적’과‘시일야방성대곡’이 떠오른다. 때문에 황성신문에 논설을 게재한 장지연은 대표적인 저항 언론인의 상징으로 기억한다. 제목은 유명하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개와 돼지라고 비난했지만 고종과 일본에 대해서 비판하지 않았음인지 장지연은 3개월 만에 석방되어 복직했다.

이보다 앞선 1904년 5월 황성신문 논설에서 장지연은 “백인종에 맞서려면 황인종은 일본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당시에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장지연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인 사람은 안중근도, 신채호도, 박은식도 같은 인물이다. 그러나 끝은 같지 않았다.

장지연은 1909년 10월에 경남일보 주필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1915년부터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글을 쓰기 시작한다. 1917년 6월 8일자 신문에는 ‘내선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찬양의 기사를 게재했다.
*
1949년 6월 경교장에서 백범 김구가 현역 군인이었던 육군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됐다. 범행 후 종신형을 선고 받았지만 3개월 만에 15년으로 감형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잔형 집행정지 처분을 받았다. 1950년 7월에 소위로, 9월에 중위로 진급하더니 1951년 잔형 면제를 받고 대위로 진급한 그는 1953년 2월에 완전 복권되었다.

강원도에서 군납 공장을 운영하던 안두희는 4.19 혁명이후에 김구 선생 살해 진상규명 위원회가 발족하자 신변에 위협을 느껴 정체를 감추고 숨어 살았다. 김구 암살 배후에 대해 조사해 달라고 여러 차례 정부에 탄원했던 권중희는 안두희의 행방을 추적했다. 1987년 마포구청 앞에서 몽둥이로 안두희를 구타한 권중희는 ‘이승만의 지시를 받았다’는 자백까지 받아냈다. 폭력에 의한 거짓 자백이었다고 밝혔지만 파장은 컸다. 결국 안두희는 1996년 박기서에게 맞아 죽었다.

재판부는 여론을 고려해서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선고했지만 끝내 김구 암살의 배후는 추측만 무성한 유언비어(?)로 남겨졌다. 국가가 나서서 암살의 배후를 밝혔더라면. 안두희도 고통스럽게 살다가 죽지 않았을 것이고 박기서도 살인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국가의 책임 회피가 만든 것이다.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와 관련된 논쟁의 중심에도 정부 관련부처의 책임이 명백하다. 제대로 된 검증도 하지 않은 채 출판을 허락한 교과서의 내용에 명백한 오류가 있다면 지금이라도 책임지는 자세로 나서야 한다. 은근 슬쩍 물타기 하는 모습에 분노가 아닌 연민할 수밖에 없는 국민의 감정을 하루빨리 치유해 달란 말이다. 언제까지 국민이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나서야 하는가.

말년의 장지연이 부끄러워 그랬는지 매일 술에 취해 살다가 술병이 나서 죽었다면 지나친 상상일까. 맨정신으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기가 무섭기만 하다.

오룡(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강남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