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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조선시대 성균관 학생들도 시위했다

오룡의 역사 타파(39)

조선의 성균관 유생들은 자부심이 대단했다. 입학 자체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웠던 최고의 국립대학이었다. 생원과 진사로 구성된 학생들은 대과 준비생으로 출세길이 보장된 예비관료였다. 전원 기숙사 생활에 학비 일체를 국가에서 제공해 주며 최고 엘리트로서의 대접을 받았다. 입학은 까다로웠지만 졸업은 정해진 기한이 없었다. 과거에 급제하면 성균관을 떠났으니, 시험에 합격하기까지는 학생으로서 품위유지를 할 수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가 96회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조정의 부당한 처사, 훌륭한 학자에 대한 문묘배향 요구, 이단에 대한 배척 요구 등이 시위의 주된 내용이었다. 자신들이 배우는 학문과 어긋나는 일, 자신들의 신념에 배치되는 조정의 주장에 대해서 시위를 한 것이다.

이들의 시위에 대해 조선 정부는 굳이 막지도, 조종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유학을 근본으로 한 조선은 유생들의 주장을 국가 발전을 위한 기회로 삼기도 한 것이다. 때문에 성균관 유생들은 시위 모의를 위해 몰래 숨어서 할 필요가 없었다. 재회(齋會)라고 하는 학생회와 유사한 자치기구에서 결정하면 행동으로 옮겼다.

명륜동에서 유소(儒疏: 유생들의 서명부)를 들고 경복궁까지 시위하던 유생들은 소장을 대궐에 보내놓고 답변이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대답이 늦어지면 천막 농성시위도 불사했다.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 올리기도 했다.

소통을 거부하는 임금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시위를 벌였다. 우선 수업거부와 단식투쟁에 돌입한다. 요즘으로 치면 집단 휴학 동맹 결의와 비슷하다. 최악의 경우는 기숙사에서 퇴거하여 집으로 돌아가 버린다. 이렇게 되면 임금의 입장이 난처해진다. 국왕의 통치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조선 8도에 공고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조선 최고의 성군이라는 세종이 대궐안에 불당을 세우자 성균관 유생들이 학교를 떠나 집으로 가버렸다. 갖은 압력으로도 유생들이 학교로 복교하지 않자 결국 영의정이었던 노 정승 황희가 유생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설득하여 해결했다고 한다.

국가의 권력이 올바로 집행되고 조정 관료들이 그나마 청렴하던 조선 전기의 성균관 유생들의 시위에 대한 처리는 정치력의 시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학생들끼리의 분열도 없었고, 조정도 그들의 주장을 대부분 수용해 주고 설득의 관점에서 처리했다.

하지만 조선 후기의 양상은 많은 변화가 생겼다. 고급학교의 기능이 서원으로 이관되고, 성균관 학생들의 정원도 절반이상 줄면서 발언권이 약화된 원인이 컸다. 무엇보다 권력을 차지하려는 붕당의 영향을 받은 학생들이 사분오열 되어 버려 힘을 모으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출세를 미끼로 줄세우기를 요구한 기성 권력자들에게 적당히 타협한 명분없는 시위로 민심과 여론의 호응을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자신의 출세만을 위해 스펙을 쌓은 학생들이 백성을 위한 정치의 개혁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새로운 인물들을 발탁하지 않고, 개혁적인 사상들이 수용되지 못하던 조선 후기의 답답했던 정치. 21세기 대한민국 정치가 국민들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이유는 소통하지 못하는, 그들만의 축제이기 때문이다.

오룡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강남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