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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능지처참을 당하다,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저자의 비극적인 삶

오룡의 역사 타파(40)

광해군 10년(1618) 8월, 반역의 주모자로 몰린 허균은 두 팔과 두 다리· 머리와 몸통이 6개 조각으로 찢기는 능지처참을 당했다.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난 앞뒤 사정을 살펴보면 허균은 더욱 이해하기 힘든 인물이다. 1589년 누이 허난설헌이 죽은 슬픔을 딛고 생원 시험에 합격한 허균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질서가 회복되면서 실시된 1594년의 과거 시험에서 을과로 급제했다. 평소 자유분방한 행동으로 방탕자라는 비난을 받아 온 탓으로 관직 임용이 늦어졌다.

형의 도움으로 1597년 황해도 도사(종5품, 오늘날의 부도지사)에 임명되었다. 허균은 서울의 기생들을 임지로 데려가 별장을 짓고 데리고 놀았다는 이유로 곧 파면되었다. 해직되어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인 1598년 보란듯이 문과 중시(문과 급제자들을 대상으로 10년마다 시행하던 시험)에 장원 급제해 조정의 중요 문서를 다루는 관리로 임용되었다. 그러나 일년도 못가 방탕한 생활로 다시 해직되었다. 1601년 다시 복직되었으나 2년 만에 양반의 품위를 손상한 자로 탄핵받아 관직을 박탈당했다. 예조 판서가 된 형의 도움으로 1604년 다시 복직되어 황해도 수안 군수와 성균관 전적(교관)을 거쳤다.

1607년 삼척 부사로 있다가 불교에 심취해 관청 안에서 염주를 목에 걸고 일하는가하면 걸승 흉내를 내기도 해 유교 사회에 정면으로 도전했다는 이유로 다시 쫓겨났다. 네 번째 해직된 그는 1608년에 공주 부사로 복직되었는데 임지에 가자마자 탄핵을 받아 함경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1610년에는 시험 감독관으로 있으면서 친구와 친척들을 우선 합격시키는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다섯 번째 해직을 당했다. 1612년 12월 일본의 정세를 조사하는 왜정 진주사(倭情陳奏使)가 된 허균은 바로 다음 날 역모 혐의가 있다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해직되었다. 이처럼 여러 번의 해직을 낳은 허균의 관직 생활은 평소 서얼 차별 같은 신분 제도의 모순에 불만을 품은 그의 자유분방한 행동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허균이 방탕한 생활로 불만을 표현했던 것만은 아니다. 서출에게도 관직 임용의 길을 열어 달라는 상소를 제출해 조정의 미움을 사기도 했으며,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여섯 명의 서출 출신들과 강원도 산 속으로 들어가 죽림칠현을 본떠 강변칠우(江邊七友)라 자처하기도 했다. 그의 일곱 번째 해직은 역모 혐의로 인한 것이었는데 일을 함께 꾸민 자들이 입을 다물어 처벌은 면했으나, 전라도 태인에서 거의 감금과 같은 격리 생활을 했다. 1613년 마지막으로 복직된 허균은 전과 달리 트집 잡힐 일을 피하면서 현실적인 처세를 하는 한편 남몰래 혁명을 준비해 갔다.

1617년 12월 정책 입안의 총책임자인 좌참찬 자리까지 오르며 왕의 신임을 받던 허균은 자신이 역모에 관련되었다는 사실이 누설되자 거사를 앞당기기로 했다. 무력으로 궁궐을 점령해 양반들을 몰살시킨다는 계획 아래, 민심을 동요시키기 위해 밤에 남산에 올라가 “외적이 침입했으니 서울을 버리고 피난 가라”고 외치기도 했다. 불심 검문에 걸린 부하 현응민이 고문에 못이겨 궐기 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체포당한 허균은 광해군의 심문을 받았다.

조선 시대를 통틀어 허균만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고 간 인물은 찾기 힘들다. 허균의 성격만큼 복잡한 경우를 찾기도 힘들다. 그는 일곱 차례나 관직에서 쫓겨났으면서도‘거사’를 위해 계획적으로 고위직까지 진출한 유일한 인물이다. 또한 세상을 뒤엎는 혁명 소설을 쓰면서 자신이 직접‘혁명’을 계획하고 실천한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혁명가’였다. 그 결과 자신이 쓴 소설 『홍길동전』은 해피엔딩으로 끝을 맺었지만 정작 작가의 최후는 비극으로 끝났다.

오룡 (오룡 아카데미 원장, 용인 여성회관,강남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