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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장 원균의 초라한 죽음…서인의 영수 윤두수와 윤근수 형제의 정치적인 희생양이었나.

오룡의 역사 타파(46)

충무공 이순신에 비해 너무 초라해 보이는 원균의 칠천량 패전과 죽음. 그를 비난하는 말 중에 원균의 편이었던 서인조차『선조수정실록』에서 원균을 좋게 평가하지 않는다고 하여 비판론의 근거로 삼고 있다.

이는 당시 시작된 붕당의 폐해로 인해 군인들이 당한 피해의 일부일 수 도 있다.
당시 서인의 영수격이었던 윤두수는 원균을 일러 친족이라 했지만 동시에 오랫동안 왕래가 없었다. 윤두수와 원균의 관계가 실록에 단 한 마디 나올 정도인걸로 보면 두 사람 사이가 그다지 친밀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선조수정실록』을 편찬하는 시기에 승자인 서인 측에 가담해 있던 아들 윤방의 영향도 있어 윤두수는 미화되었지만 원균은 그 반대로 오히려 서인들의 무능과 비리를 죽은후에 혼자 다 지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점으로 보면 윤두수는 원균을 자신의 정치적인 승리를 위한 도구로 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넘어가 이용당한 원균의 책임이 없다 할 순 없다.

처음 부산 진공을 건의하여 이순신을 곤경에 빠뜨리고 이순신이 파직되자 슬그머니 손을 뗀 윤두수,그 후 칠천량 패전의 책임은 권 율, 원균의 야전군 장수들에게 돌리는 윤두수의 정치적 능력은 탁월했으니 전쟁터에서만 살아 온 씩씩남,용강남 원균이 당해내기 어려웠을 지도 모른다.

신은 지난번 또 한산(閑山)의 주사(舟師)를 빨리 거제(巨濟)의 장문포(場門浦)에 진주하게 할 것을 아뢰었습니다.

이제는 저 적이 와서 침범할 형상이 이미 드러나 눈앞에 닥친 일이라 매우 급박하므로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죄다 거제에 진주하여 수로(水路)를 제압하고 있다가 책사(冊使)가 나온 뒤에는 모든 오가는 적의 배를 곧 주사로 막아서 잡아 죽임으로써 적이 오는 길을 끊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혹 적의 장수가 나오는데 주사의 장수들이 전쟁을 꺼려서 미처 막지 못하였다고 핑계하거든 곧 군법으로 처리하여 군율(軍律)을 엄하게 해야 합니다.

바라건대 속히 하서(下書)하여 이 순신 등이 급히 진주하도록 엄히 신칙하여 다른 말로 핑계하지 못하게 하소서.
(출처:『선조실록』윤 근수의 상소)
이처럼 조선 수군의 '무모한' 동진을 제일 처음 제안했으며 이를 거부한 이 순신에 대한 처벌을 강력히 주장한 사람이 바로 윤 근수였다.(위의 상소 내용 또한 원균의 상소가 있기 2달전에 이미 올린 것이다)

이 순신의 파면과 조선 수군의 칠천량 패전의 첵임은 이 순신과 원균의 대립보다는 정치적 계산능력이 빨랐던 윤두수와 윤근수 등의 일부 정치인들의 책임이 더 크다.

임진왜란 1등 공신은 셋만 책봉됐는데 이순신·권율·원균이다. 따라서 원균이 이순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음은 분명하지만 무능한 군인은 아니었고 나름 전공도 뛰어났다. 사실과 달리 원균에 대한 나쁜 인식이 퍼진 원인을 1960~70년대 성웅 이순신 성역화 작업 때문이라면 지나칠까.

개그맨 출신 영화감독이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영화로 만들겠다고 한다. 심포지움에 참석한 이들은 영화 ‘변호인’을 비난하고 이승만을 찬양했다. 영화 제작의 의도를 너무 일찍 보여준 것은 아닌가. 두고 볼 일이다.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