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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와 돈은 어떤 관계였을까 …아무데서나 만든 엉터리 화폐였던(?) 상평통보

오룡의 역사 타파(47)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화폐는 996년 고려 성종때 만들어진 건원중보이다. 조선 건국 후인 1423년 세종 5년에도 조선통보를 발행했으나 유통되지 못했다. 교과서에 널리 유통된 것으로 알려진 상평통보는 1633년 상평청을 통해 주조된 것이다. 몇 번의 폐기를 거듭한 상평통보는 1678년 숙종대에 재발행 된 후에야 전국적인 법화로서 정착된다.

광범한 유통에도 불구하고 상평통보는 신뢰하기 어려운 화폐였다는 것이다. 이유는 모양은 비슷했지만 불량품이 너무나도 많았다. 조선후기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에서 거래시에 동전을 자세히 살펴보는 장면을 추가해도 어색한 장면은 아니다.

상평통보 제작을 관리 감독하는 관청이었던 호조는 개인에게도 특허를 내주었고, 지방의 감영이나 군영에서도 찍어냈기 때문이다. 통용되는 지역마다 구리의 함량이 다른 것은 물론 고의적으로 비싼 구리 대신 철의 함량을 높여 부정축재하는 관리들이 있었다. 실학자 유수원은‘주조한 성분이 분명치 않고, 무게도 서로 다르며 두께와 넓이마저 다르다’고 기록했다.

화폐의 질이 떨어졌다는 것은 화폐의 가치가 떨어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다. 상평통보의 질이 나빠질수록 시장에서 상품의 가격은 올랐다. 조선 왕조가 취한 방법 중의 하나인 연례주전법으로 상평통보를 연간 10만냥씩만 주조하자 전황이라 불리는 화폐부족 현상도 나타났다.

화폐가 부족하다는 것은 화폐의 기능을 유통수단이 아닌 재물 축적의 수단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상주의 학자였던 유수원이 “쌀을 쌓아두면 관리하기 어렵고 썩어서 못 먹게 될 것이고, 광목이나 베를 사들여 축적한다면 습기나 좀 등으로 못쓰게 될 것이지만, 화폐는 그러한 면에서 매우 편리하다”고 했다.

화폐가 나오고 나서 평민들의 삶이 더 어려워졌는데, 실록에는 ‘흉년에 화폐마저 없는 사람들이 자기 자식을 잡아서 고기로 먹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조선 전기에 없었던 기록이 후기에 여러 차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재물 축적을 할 수 없었던 일반 백성들은 화폐보다 식량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국가가 구휼을 위해 화폐를 지급하자는 방안이 나왔는데, 백성들은 화폐보다 쌀을 더 좋아했다는 기록이 수차례 있다.

처음에는 사대부들도 화폐를 천하게 여겼다. 직접 만지기보다 노비에게 대신 지니게 하거나 부득이한 경우는 젓가락을 사용했다. 그조차 힘들 때는 왼손으로 만졌다. 선비들이 오른쪽 소맷자락 안에 화폐가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았다. 오죽했으면 오른쪽 소맷자락을 뒤에서 툭 쳐서 돈이 떨어지면 주워 도망치는 행위 또는 그런 자를 소매치기라 했을까.

이러한 현상은 아마도 정조가 발표한 신해통공으로 인해 무너지기 시작한 듯하다. 조선의 경제체제가 사농공상의 성리학적 명분적 질서보다 중상주의 실학자들의 노선을 받아들일 만큼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하고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화폐유통을 통해 평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겠다는 본래의 취지보다는 일부 계층들의 재산 증식에만 도움이 되었던 상평통보의 발행, 어쩌면 조선 멸망 원인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