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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양반은 영원한 양반인가?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들은 아직도 전직책으로 불러주는 나라

오룡의 역사 타파(48)

1592년의 인진왜란과 1636년 병자호란은 조선의 사대부와 왕의 민낯을 제대로 보여줬다. 백성은 분노했지만 그 뿐이었다. 하지만 떨어진 지배층에 대한 불신은 걷잡을 수 없었다. 신분제 사회는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선후기 등장한 수많은 한글소설, 판소리와 사설시조는 양반을 조롱했지만 양반을 동경하는 백성들의 마음을 표현했다면 지나친 것일까. 18세기 이후 정착된 장자상속과 모내기로 성장한 부농의 등장은 수많은 놀부와 흥부를 만들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신분의 상징이었던‘양반’에 대한 명칭은 이놈 저놈 하듯이 이 양반 저 양반이라 부르는 호칭으로 전락했다. 공명첩을 사서 돈으로 된 양반, 아무도 모르는 곳에 가서 양반 행세를 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경제적 부농과 상인들에게 해당 될 뿐이었다.

조선은 근본적으로 신분제 국가로 출발했다. 삼봉 정도전이 불량인물로 낙인된 조선전기는 신분제의 적용이 엄격했다. 원래 양반은 문관인 동반과 무관인 서반을 지칭했다. 4대조 이래로 9품 이상의 관직에 나가지 못하면 양반의 신분에서 탈락했다. 지배층의 비대화를 막고 소수의 권력 독점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3년마다 실시된 식년시 대과 시험을 급제 해야만 관직 진출이 가능했던 초기에는 양반의 권위는 상상 이었을 것이다. 양반이 되기도 어렵지만 자자손손 지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대과 급제자가 33명에 불과했으니 양반의 대열에서 탈락할 가능성은 어느 집안이나 존재했다.

오래 양반을 하기위해서 별도의 방법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그 중의 하나가 혼반(婚班)으로 양반들끼리 사돈을 맺고 계급적 지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조선 중기까지도 출가한 딸에 대한 처우가 관대한 이유도, 재산 상속의 균분도, 처가 재산의 사위 상속이 어렵지 않았던 이유도 계급적 역학관계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더 확실한 방법은 동족 마을을 만들어 모여 사는 것이다. 반촌(班村)을 형성하여 소수의 양반 가문들이 다수의 소작 농민들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신분을 유지했다. 반촌의 양반들은 4대조 안에 관직 진출을 못해도 사돈의 8촌까지 친척 관계를 형성하여 양반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조선후기에 양반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결정적 이유는 양반 숫자의 증가 보다 지식의 빈곤도 한몫 했을 것이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양반들이 대량으로 등장한 것이다. 양반은 곧 선비이며 지식인 이었던 시대에는 사서 삼경을 읽지못하면 경멸과 멸시를 받았다. 지식의 독점은 양반 권력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김홍도의 작품인 <자리짜기>에는 몰락한 양반의 간난한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호롱불 아래서 길쌈하는 부인과 자리짜는 남편, 등 돌리고 앉아서 책을 보는 아들의 모습속에 현재가 겹쳐진다.
돈 주고 산 양반의 신분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은 자식 교육이 중요했을 것이다. 논 팔고 소 팔아서 대학을 다녔던 60년대 대한민국에 나타난 우골탑은 조선후기에 시작된 신분상승(?)의 마지막 기회였을까. 지금은 그 기회조차 사라진 걸까.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