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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은 승자 독식의 최대 수혜자 일까…드라마와 사실의 차이가 만들어 낸 스타(?) 비담

오룡의 역사 타파(50)

혁명과 쿠데타는 순간의 차이가 승패를 좌우한다. 역사에서 반란이라고 정의하는 모든 사건은 초반에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비담의 난도 그러하다. 비담은 김유신이 경주를 비운사이, 선덕여왕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제대로 돌볼수 없는 틈을 노렸다.

상대등 비담은 이찬 알천이 지키는 왕궁을 점령하지 못한다. 백제·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승전의 경험이 무수했던 알천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왕궁의 수비를 뚫지 못할 때 부터 비담은 실패한 것이다.

비담은 경주 인근 명활산성을 점령한 후 월성에 군대를 배치한 김유신과 열흘간의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지만 승부를 결정짓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하늘의 큰 유성이 월성쪽을 향하여 떨어졌다. 비담은 여왕이 패할 징조라며 반란군을 독려하였고, 옛부터 유성이 떨어지는 것을 불길한 징조로 생각한 김유신 군이나 왕실도 크게 흔들렸다.

이에 김유신은 '길흉은 오직 사람이 부르는 것이며, 덕이 요사스러움을 이기는 것이 이치'라며 군대를 안심시켰다. 그런 후 허수아비에 불씨를 살리고 연에 달아 하늘에 띄워 보낸 후, 어젯밤에 떨어졌던 별이 하늘로 다시 올라갔다는 말을 비담군 진영에 퍼뜨렸다. 비록 믿기 힘든말 이었지만, 열흘간의 싸움에서 지친 비담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기엔 충분했다.

김유신은 별이 떨어진 땅에 백마를 잡아 제를 올렸다.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지금 비담 등은 신하로서 임금을 도모하니 이른바 난신적자요 천지에 용납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직 하늘의 위엄으로써 백성의 염원에 따라 선을 이루게 해주십시오.

대의명분에서 비담을 압도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비담의 지략을 역이용하는 김유신의 순발력으로 군사들의 사기까지 충만해지자 비담은 더이상 상대가 되지 못하고 무너진다.

진덕여왕 원년 정월 17일, 비담은 결국 김유신 군에 의해 척살 당한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비담의 구족을 모두 멸하였다고 나오는데, 척살당한 30명 대부분이 비담과 혈연관계로 얽힌 친인척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역사 기록엔 승자 김유신의 행적은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패배자 비담에 대해서는 아주 짧은 기록만을 전하고 있다. 비담의 난이 기록된 삼국사기에는 선덕여왕 15년인 646년 11월, 신라는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을 돕기위해 3만의 군대를 지원한다. 김유신은 백제의 동진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즉 신라 경주에는 궁궐 수비를 담당할 병력이 부족하였던 것이다. 비담은 상대등에 오른지 두달만에 난을 일으켰고, 선덕여왕은 비담의 난 와중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김부식이 난이라고 규정한 비담의 난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선덕여왕 사후 차기왕권을 노린 진골 왕족간의 왕위 계승전쟁인가 아니면 선덕여왕의 노골적인 친당 사대정책에 대한 반발일까. 그것도 아니면 김유신과 김춘추, 알천 등의 신진세력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구귀족들의 선제 공격이었을까.

비담은 황룡사 9층 목탑 건립을 반대했을 것이다. 대야성이 함락된 상황에서도 정치적 책임을 지지않으려는 김춘추는 수세였고 여동생까지 정략결혼을 시킨 김유신은 조급했을지 모른다. 상대등 비담은 왕위 계승 일순위였고, 명분도 충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도 국가의 위기를 자초한 정치적 책임은 여왕에게 있다고 한 비담의 주장이 역사에는 결국 반란군의 혹세무민이라 기록되고 말았다.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