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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의 패전국 일본의 히로히토를 살려준 맥아더

오룡의 역사 타파(53)

우리 역사속에 맥아더는 위대한 군인으로 남아있다.

1926년 일본왕 히로히토가 취임한다. 그는 연호를 '쇼와'라고 발표한다. 일본어로 '쇼와'는 평화와 계몽을 의미한다. 젊은 시절 영국에 유학했던 그는 훗날의 에드워드 8세를 만났는데 이때가 자기 인생의 가장 행복한 시기라고 말했다. 영국에 선전포고 하는 것에 대해 매우 슬프다고 한 것을 보면 이 말은 사실에 가깝다.

1930년대 들어서 일본은 급격한 군국주의 노선을 채택한다. 31년 만주 사변을 시작으로 37년 중일전쟁, 41년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육군상 스기야마는 2개월 이내에 전쟁을 완료 하겠다고 일왕에게 보고했다. 일본은 장기전을 준비하지 않았다.

2차 대전 종전후에 그는 기회가 있을때 마다 전쟁을 반대했다고 말했지만 그가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한 이유는 해군의 준비가 미흡하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진주만 기습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반대가 아닌 기습의 성공 여부였던 것이다. 공격이 성공하자 축하 연설을 한 것으로 보아 군부의 꼭두각시가 아닌 총 지휘부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히로히토가 무기력한 이미지로 각인된 것은 맥아더가 보여준 전략적인 판단이었으리라. 수줍고 내성적인 안경쓴 작은 체구의 그가 보여준 모습에서 그 이미지는 더욱 노골화 되었다.

1945년 9월27일 오전 10시 히로히토 일왕은 적갈색 롤스로이스에 몸을 싣고 궁을 나섰다. 수행원을 태운 차량 3대 외에는 호위대가 따라붙지 않았다. 히로히토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침략전쟁의 패배로 그의 이름은 연합군 군사재판소의 전범 리스트 상단에 올라 있었다.

히로히토 일행이 멈춘 곳은 미국 대사관저였다. 그가 차에서 내리자 점령군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가 악수를 청하며 그를 맞았다. 일본 측 통역관 1명만 배석한 회담은 40분간 이어졌다. 양측은 회담내용을 비밀에 부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회담내용은 공개되지 않았다. 후일에 맥아더의 회상록에서 그 내용이 처음 언급됐다. 맥아더의 회고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전쟁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하지만 75년 언론에 공개된 통역관의 노트에는 ‘책임진다’는 내용은 없었다.
회담 당시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물어 법정에 세우고 천황제를 폐지할 것인지가 일본 안팎에서 최대 관심사였다. 하지만 아시아 국가 및 연합국과 달리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처벌할 의사가 없었으며 천황제를 폐지해선 안된다고 밝혔다. 그는 히로히토가 법정에 서면 일본 사회가 불안해져서 미군의 통치가 힘들어진다고 생각했다. 히로히토는 패전 후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회담 이후 잠을 잘 잤다고 한다. 46년부터 개시돼 2년간 이어진 도쿄 전범재판에서 히로히토는 기소되지 않았고 증인으로 출석하지도 않았다.

식민지 국가였던 우리에게 보여준 악랄한 민족 말살 정책과 731부대의 마루타의 실체를 알고 있었을 히로히토를 기소하지 않은 맥아더는 우리에겐 북한의 남침을 막아낸 전쟁의 영웅으로 남아있다. 어쩌면 히로히토의 전쟁책임을 무마시켜 준 것은 맥아더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 역사일지도 모른다.

2차대전 주축국이었던 독일의 히틀러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도 비참하게 죽었지만 히로히토는 아주 오래 살다가 1989년에야 죽었다. 천수를 누리며 살다간 그는 식민지 통치와 전쟁에 대한 아무런 반성도 없었다.

지금도 그 아들 아키히토는 신성불가침의 영역인 일본의 왕으로 건재하다.



   
맥아더를 찾아온 일왕 히로히토의 부동 자세(도쿄, 1945. 10.)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