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맑음동두천 26.7℃
  • 맑음강릉 20.5℃
  • 맑음서울 27.4℃
  • 맑음대전 28.9℃
  • 맑음대구 31.3℃
  • 맑음울산 24.0℃
  • 맑음광주 29.3℃
  • 맑음부산 24.7℃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2.0℃
  • 맑음강화 22.8℃
  • 맑음보은 27.5℃
  • 맑음금산 27.8℃
  • 맑음강진군 29.4℃
  • 맑음경주시 29.5℃
  • 맑음거제 27.3℃
기상청 제공

일본의 한반도 약탈의 역사-역사는 반복된다.

오룡의 역사 타파(55)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일본이 백제 부흥을 지원했다. 663년 백강하구에서 일본군 4만 2000명의 군대와 300척을 격퇴하면서 일본에 대한 외교적 태도가 바뀌게 된다.

그동안 일본은 당의 율령체제를 모방해 국가체제를 정비하며 천황 중심의 일본식 중화사상에 입각한 대외이념을 표방하면서 신라를 자신들의 번국(藩國)으로 간주하는 야량자대(夜郞自大)적인 태도를 표출하기도 했다. 일본 서기 등이 편찬되면서 소위 진구 황후의 삼한 정벌설이 조작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당시에 상승일로의 국세에 있던 신라로서는 이런 일본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720년 경부터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치닫기 시작했다. 동시에 일본의 무례한 태도도 도를 넘어 급기야 753년 경덕왕 12년에 일본이 사신을 파견해 조공을 강요하다가 추방당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신라에서도 사신을 파견했다가 다자이후(太宰府)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자 당시 일본의 실세 권력자였던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자신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는 세력의 여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신라정토계획을 추진하게 된다. (후지와라 나카마로는 그 당시 일본의 병권을 모두 장악했었고 그의 집은 사찰이나 궁전에서만 쓸 수 있었던 큰 주춧돌, 천황만이 쓸수 있었던 연꽃무늬를 그린 기와막새를 사용했었다.)

일본은 후쿠오카에 이토성을 쌓고, 미노와 무사시 지역에서 소년들을 선발해 신라어를 가르치고, 4개도지역(호쿠리쿠도, 산인도, 산요우도, 난카이도)에서 3년 뒤인 762년까지 배 500척을 건조할 것을 명령한다.
이에 신라는 중앙군을 육기군이라는 하나의 시스템으로 재편해 왕경방어체제를 강화하고, 지방군대를 새로 재정비해 유사시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있도록 개편하고, 울산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모벌군성에 수천 명의 노사를 배치시켜 놓는다. (당시 노는 최신 무기로서 중국에서 발명되었지만 신라의 기술이 접목되어 신라를 대표하는 무기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자 일본은 발해와의 협공계획을 세운다. 발해는 신라가 멸망시킨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판단에서 발해에 협공을 요청하지만, 그 당시 발해는 신라도를 설치하고 신라와의 교류를 증진하던 터라 일본의 협공 요청을 거부한다. 이로써 일본의 신라 정복 계획은 무산된다.

고려 공민왕시기부터 공양왕시기에 5백여 회가 넘는 왜구의 침략과 약탈이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내륙과 평안도와 함경도의 근처 바다까지 이어진다.

1930년대에 일본이 보유한 조총의 숫자는 유럽 대륙전체가 보유한 조총보다 많았다. 그런데도 한심하게 지배층은 당파싸움이나 일삼고 있었다. 내분의 땅이었던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의 불만세력의 관심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1592년 15만 명의 군대로 조선을 침공했으며, 그 결과 국토의 4할 가량이 왜군에게 약탈되었다. 많은 조선인이 포로로 끌려가 유럽에 노예로 팔려갔으며, 수없이 많은 기술이 유출되어 일본 근대화의 상업적 기반이 되었다.

흔히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급격히 근대화 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18세기말에 서울의 인구는 약 30만 명, 베이징의 인구는 약 50만 명, 런던이 약 80만명, 파리가 약 50만 명이었지만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가 있었던 에도의 인구는 163만여 명이었다. 네덜란드와 교류하는 등 이미 임진왜란 후부터 일본은 조선과 중국보다 앞섰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단결된 일본이 최강이라는 자신감이 생겼고, 이것이 일본 전체주의의 초석이 된 것이다. 그 자신감과 자만심에서 나온 역사적 결과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그들은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했지만 과거의 침략을 포장하여 교과서에 기록했다.
그들이 과거의 역사에 대한 향수를 느낀다면 역사는 다시 반복 될 것이다.

오룡 오룡 인문학연구소 원장, 경기도립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