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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의 진정한 의미는 꽃미남 이었을까? 김유신과 사다함 그리고 관창의 공통점은…

오룡의 역사 타파(56)

660년 7월, 황산벌에서 백제 계백 장군의 5000 결사대에 가로막힌 신라가 승리한 원인은 관창의 죽음이다. 열여섯 살의 어린 관창을 죽음으로 인도한(?) 이는 그의 부친이었다.

“네가 나이는 어리지만 굳은 의지와 기개가 있다. 오늘이야 말로 공을 세워 부귀를 얻을 때이니 용기를 내지 않겠느냐”는 권고를 듣고 단신으로 뛰어 들었다가 죽었다.

화랑이란 무엇인가. 화랑제도는 신라 진흥왕때 국가 조직으로 정비된 것으로‘미소년을 뽑아 화랑으로 삼고, 그 아래 젊은이들을 모아 교육하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몸과 마음을 단련시켰다’고 삼국사기에 적혀 있다.

화랑은 14,5살된 진골 출신이 뽑혔으며, 그를 중심으로 수백여 명의 낭도가 형성 되었다. 나이 어린 진골 귀족의 미소년이 수백여 명의 낭도를 데리고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훈련을 시킬 수 있었을까. 정치·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귀족들의 후원을 받은 사적인 정치 기반으로서의 성격도 있을 것이다.

진흥왕이 화랑제도를 정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한강 유역으로 진출한 신라가 원시적인 국가의 단계에서 중앙집권 국가로서의 변신을 꾀했다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과거 잘못된 역사 교육의 폐단 중에 하나가 애국적인 역사관의 강조였다. 그로인해 나이어린 화랑들의 무용담(?)은 국가에 복종하는 모범적인 청소년으로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화랑에 대한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내용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화랑과 화랑도이다. 화랑도(花郞徒)는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를 가리키며, 화랑도(道)란 화랑도(徒)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뜻한다.

화랑 정신을 상징하는 세속 오계를 정했다는 원광법사는 승려이다. 그가 살생유택을 내세운 것도 의아스럽고, 오계를 받은 귀산과 추항 등이 화랑이었을 가능성도 부족하다. 세속 오계가 당시 젊은이 들을 위해 계율로 삼으라고 내려 준 가능성도 있다.

귀족들의 사병 집단 또는 인재 양성 역할을 했던 화랑제도는 신라가 통일 전쟁을 치러야 할 때 매유 유용한 존재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어진 관리와 충신들이 여기서 나오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여기서 나왔다”고 적혀있으니 귀족들의 인재 등용 방법으로써 활용했을 것이다.

상무적인 정신이 통일 시기에 필요했다면, 통일 이후에는 안정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서 국정 운영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집단이 아닌 풍류도(風流徒)의 역할을 강조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신라 멸망시까지 화랑제도가 존재한 이유는 국가 차원의 관리 선발제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화랑도를 양성한 진골 귀족들은 정치력을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라도 운영했을 것이다.

신라 말기의 지식인 최치원은 화랑도를 “나라에 깊고 그윽한 도(道)가 있어 풍류라 하니 실로 유불선을 포함 한다”라고 풍류도를 강조했다.

화랑제도는 원래 신라 귀족 사회의 인재 발굴 양성소로서의 고유한 제도 였다. 화랑과 화랑도, 화랑정신의 역사적 배경과는 사뭇 다른 호국정신 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사회가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들을 만들기 위한 교육에 치중하기 때문일까.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