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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처럼 아름다운 화성 - 미완의 개혁,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비극이었다.

오룡의 역사 타파(60)

오룡의 역사 타파(60)

꽃처럼 아름다운 화성 - 미완의 개혁, 정조의 죽음은 조선의 비극이었다.


“호위를 엄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요, 변란을 막기 위한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나의 깊은 뜻이 있다. 장차 내 뜻이 성취되는 날이 올 것이다”(정조실록 15년)

정조는 1792년 초여름 정약용을 조용히 불렀다. 수원에 새 성을 쌓겠다는 뜻을 밝히고 좋은 방책을 강구해 보라고 이르고 관련 도서를 내려주었다. 정약용은 고심 끝에 기중가(起重架)의 설계 도면을 바쳤다.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도구였다. 1794년 2월 시작된 공사는 2년 7개월만에 완성됐다. 성 쌓기에 일반 백성이나 승군(僧軍)을 불러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인부와 장인을 모집해 노임을 주고 거처를 제공했다. 5만5000명의 인부가 몰렸다. 정조는 내탕금 86만냥을 내놓았다.

화성은 팔달산을 끼고 낮은 구릉을 따라 쌓은 평산성이다. 성 중간에 작은 냇물이 흐르며 평지에는 방어호를 둘렀다. 총 둘레는 5520m이다. 성의 특징은 자연석이 아닌 벽돌을 섞어 사용하면서 돌의 규격을 맞추어 축조했다는 점이다. 사람이 거주하는 읍성의 기능과 방어의 역할도 겸했다.

정조는 왜 막대한 물량을 들이면서 성을 쌓았을까?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그리워 하는 효심 이었을까. 옷도 기워 입을 정도로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정조, 백성의 마음을 헤아린 그가 효도의 목적으로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성을 축조한 것은 아닐 것이다.  
화성은 본디 외적의 침입 방향과도 거리가 있다. 상업을 활성화 시키겠다는 의도가 있었다면 옹벽이 있는 견고한 성을 축조한 이유는 무엇인가. 옹벽과 사통팔달, 방어와 공격의 목적을 갖고 있는 화성을 쌓은 의도는 천도를 위한 사전 준비는 아니었을까.

조선의 왕 중에서 가장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정조는 49세에 죽었다. 빠르지도,늦지도 않은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의 죽음을 두고 말들이 많다. 정조는 악성 종기를 오랫동안 앓았다. 온갖 처방에도 낫지 않자, 수은을 태운 연기로 종기를 치료하는 연훈방(煙熏方)을 쓰기도 했다. 1800년 6월28일 정순왕후 대비 김씨는 손수 탕약을 들고 들어가서 어의를 내보냈다.

잠시 후에 대비 김씨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어의들이 황급하게 뛰어 들어가자 정조는 중태에 빠져 있었다. 정조가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남긴말 수정전(壽靜殿). 행장을 쓴 이시수는 ‘할 말이 있다’는 뜻이라고 했지만 이 말은 곧 대비 김씨가 거처하는 곳을 가리킨 것이다.

정조는 종기가 처음 번질 적에 울화병 또는 심화병 탓이라 했다. 종기는 바람을 쏘여서는 안된다고 하여 한 여름에도 문을 꼭꼭 닫아걸고 뜨거운 탕약을 수없이 마셨으며 수은 치료까지 받았다. 게다가 마지막 일주일은 억지로 미음 몇 모금을 넘길 정도였다. 울화병, 더위와 탈진 그리고 영양실조가 목숨을 재촉했을 것일까. 아니면 정순왕후 대비 김씨가 들고 간 탕약 탓일까.

정조가 죽고 난 뒤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 순조를 내세워 수렴청정을 실시한다. 1801년 신유박해는 개혁 세력을 죽음의 공포로 몰아 세웠다. 명분은 천주교 탄압이었지만 목적은 정조가 키운 신진 세력의 제거였다. 정약용은 유배길에 올랐고, 그가 직접 참여한 화성 건설의 기록인 <화성성역의궤>에서 조차 이름이 빠졌다.

정조의 개혁정치는 모조리 뒤집혔다.
조선은 그 후로, 다시는 진정한 군주를 만나지 못했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