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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와 이승만의 닮은 꼴, 다른 꼴 -반복되는 역사의 희생자는 민(民)

오룡의 역사 타파(62)

오룡의 역사 타파(62)

선조와 이승만의 닮은 꼴, 다른 꼴 -반복되는 역사의 희생자는 민(民)

임진왜란은 음력으로 1592년 4월13일(양력 5월23일) 시작됐다. 선조는 4월 30일 새벽에 한양을 탈출했다. 백성들의 분노가 형조와 장례원을 불태운 것으로 볼 때 선조에 대한 당시 한양의 민심을 짐작할 수 있다. 선조는 개성·평양·영변을 거쳐 6월 22일에 평안도 의주에 도착했다. 조선의 영토에선 최전방이지만 그에게는 아직 끝이 아니었다.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갈 수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선조는 명나라 망명 계획을 포기했다. 그 해 6월 26일자 <선조실록>에 따르면 명나라가 선조를 푸대접 할 것으로 보인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였다. 명은 선조가 국경을 건너오면 망명 정부를 압록강 인근의 전방 군사기지인 관전보에 마련해 줄 계획이었다. 선조는 이때쯤 체면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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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7일 새벽 2시, 대통령 이승만은 주저없이 서울역에서 비상 열차를 탔다. 장관들도, 군 수뇌부도, 국회도 모르게 혼자 가버렸다. 국군 통수권자가 위험에 빠질까봐 비밀유지를 위해 새벽에 몰래 대구까지 내려간 것인지, 너무 멀리 왔다고 생각한 대통령은 다시 대전으로 올라온다. 라디오 방송 담화를 통해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라며 국민을 안심시킬 때였다.

대통령 혼자 탈출한(?) 2시간 뒤인 새벽4시에 이승만은 수원 천도를 결정했다. 만약 이 정도로 끝났다면 이승만과 선조는 고만고만한 지도자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동급이라고 하면 지하의 선조가 화낼 지도 모를 이승만의 놀랄 만한 행보가 따로 있다. 1996년 4월14일자 <조선일보>를 포함한 국내 언론들이 일본 교도 통신을 인용해서 보도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기도 전에 이승만은 이미 일본 망명 계획을 세웠다. 교도 통신이 제시한 자료는 전 야마구치현 지사이자 전 통산성 장관인 다나카 다쓰오가 쓴 회고록과 미국 국무부가 발행한 <미국 외교관계>다.

1950년 7월14일, 미국 주도의 유엔군이 꾸려지기도 전에 대통령 이승만은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에게 편지를 보내 한국군의 작전 지휘권 일체를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한국군이 전시와 평시를 포괄하는 개념의 작전 통제권을 외국인에게 넘겨준 것이다. 당시 이 대통령은 편지에서 “본인은 현 작전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일체의 지휘권을 이양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기는 바이며, 지휘권은 귀하 자신 또는 귀하가 한국 내 또한 한국 근해에서 행사하도록 위임한 기타 사령관이 행사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미국을 통해 대한민국 망명 정부를 세우는 준비에 착수했다. 망명 정부의 기지로 예정된 곳은 한국과 가까운 야마구치현에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숙소를 만들 계획을 세웠다. 전쟁 초기에 진행된 망명 작전은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을 계기로 무산되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은 조선과 대한민국 즉 우리 역사에 끼친 영향이 매우 크다. 선조와 이승만은 전쟁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사대의 나라 명나라에 피신하려고 한 선조와 악랄한 식민통치를 자행한 일본에 망명 정부를 꾸리려고 한 이승만은 달리 보인다.

작전 통제권 가운데 평시 작전 통제권이 한국군으로 넘어온 것은 김영삼 정부 시절인 1994년 12월1일이다. 전시 작전 통제권을 한국군에 전환하기로 한 것은 2012년 4월17일 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전환 연기를 계속하고 있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