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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했던 백제의 한성 시대를 마감하게 만든 개로왕의 토목공사

오룡의 역사 타파(63)

오룡의 역사 타파(63)

찬란했던 백제의 한성 시대를 마감하게 만든 개로왕의 토목공사

"나라 사람들을 모두 동원해서 흙을 구워 성을 쌓고 그 안에 궁실(宮室)·누각·정자를 마련했다. 굉장하고 화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큰 돌을 욱리하(한강)에서 가져와 곽을 만들어 아버지의 뼈를 묻고 강을 따라 제방을 쌓으니, 사성(蛇城, 풍납토성) 동쪽에서 숭산(검단산) 북쪽까지 이르렀다. 이로 인해 창고가 텅 비고 백성이 곤궁해지니, 나라의 위기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 심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오는 개로왕의 풍납토성 보수공사 관련 기록이다. 개로왕(재위 455~475년)은 고구려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아차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비극의 백제왕이다. 개로왕의 비극인 동시에 한강유역을 상실한 백제 몰락의 시초였다.

적자재정으로 궁핍해진 백제는 군대의 유지조차 힘들어 졌고, 백성의 징발도 어렵게 된다. 남진정책의 기회를 노리던 고구려의 장수왕은 3만 군대를 보내 불과 7일만에 한성을 함락 시킨다. 개로왕은 백제 출신의 고구려 장군들에게 붙들렸다. 이 고구려 장군들은 말에서 내려 개로왕에게 절한 뒤에 왕의 얼굴에 세 번 침을 뱉고서는 아차산(풍납토성 건너편, 천호대교 북단)으로 끌고 가서 죽여 버렸다. 태자 문주는 한성을 버리고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왜, 개로왕은 토목사업에 매달렸을까? 장수왕의 부추김 때문이다. 이 과정이 <삼국사기>에 소개되어 있다.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를 침공하고자 하면서, 그쪽에 간첩으로 갈 만한 사람을 구했다"고 한다. 장수왕의 지시에 의해 승려 도림은 거짓으로 백제에 망명한다.

도림이 개로왕을 만나 바둑을 두며 나누는 이야기는 너무 상세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다.도림의 바둑 실력에 탄복한 개로왕은 그를 국수(國手)라고 떠받들면서, 도림을 너무 늦게 만난 것을 후회할 정도였다고 한다. 어느날 바둑을 두며 도림은 말한다.“대왕에게 받은 은혜는 너무나도 큰데 자신이 해 드린 것이 너무나 적어서 마음이 괴롭다”며 안타까워 한다.

개로왕이 "말을 해보라"며 재촉하자, 그제야 도림은 마지못하는 척 입을 열었다. “이웃나라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천혜의 요새에서 나라를 통치하고 계신 대왕의 위엄과 권위를 세워야 한다”며“이처럼 성곽과 궁실도 제대로 짓지 않고 백성들의 가옥을 홍수에 방치하고 있으니, 이렇게 해서야 어떻게 대왕의 체면을 살릴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왕의 체면도 세우시고 홍수 피해도 막으셔야 하는데, 이렇게 가만히 계시니 자기 마음이 아프다는 것이었다. 이 말에 자극을 받은 개로왕은 즉각적으로 대규모 토목사업을 벌이다가 나라를 망친 것도 모자라서, 붙잡혀 죽임을 당했으니 얼마나 비참한 말로인가.

우리 역사 최초의 한강 정비 사업은 현재의 천호대교에서 미사대교 정도까지 제방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그릇된 욕심을 위해 백성을 괴롭히다가 5백년 한성 백제의 몰락을 자초한 개로왕. 그의 비극은 개인의 불행을 넘어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은 비극이다.
21세기 대한민국의 4대강 토목 사업은 어떠한가? 사업을 강행한 당사자에게 만큼은 비극적인 사업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