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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버리고 도망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 그는 강화도에서 행복했을까?

오룡의 역사 타파(65)

오룡의 역사 타파(65)

백성 버리고 도망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 최우,
그는 강화도에서 행복했을까?

1231년 몽골의 기병이 북계를 휩쓸었다. 안정기를 누리던 고려의 무신 정권은 맞서 싸우기보다 피난을 선택했다. 교정도감 최우에게 강화도 피난을 권한 사람은 풍덕군(지금의 개풍군)의 승천부 부사 윤린이었다. 윤린의 말을 들은 최우는 반대파들을 제거하고, 고종에게 강화로의 천도를 강요한다.

1232년 7월 6일, 강화도 피난길을 <고려사>는 이렇게 기록했다. “드디어 천도하니 때마침 장맛비가 열흘이나 계속돼 정강이까지 진흙에 빠졌다. 사람과 말이 엎어지고 넘어졌다. 벼슬아치와 양가(良家)의 부녀들도 신발을 벗고 갈 지경이었다. 환과고독(鰥寡孤獨)은 갈 바를 잃고 통곡하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피난의 아비규환을 뚫고 강화로 온 사람들은 그나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방치된 본토의 백성들은 30여 년간 몽골의 말발굽 아래 목숨을 잃거나 포로로 끌려갔다. 살아남은 자들은 강화로 도망간 왕과 무신들을 위해 세금을 바쳤다. 몽골은 수시로 쳐들어 왔으니 삶과 죽음을 가늠할 수 없었다.강화의 원주민들은 어떠했을까? 피난 온 개경 사람들은 다수가 권력자이거나 관련된 자들이었으리라.

강화도에 천도한 최우 정권이 만들었던 삼별초가 야별초에서 출발했음은 무엇 때문이랴. 살던 곳을 빼앗긴, 각종 부역에 끌려 다녔을 원주민들에게 39년간의 강도(江島)는 재앙으로 기억될 것이다. 산을 깎아 궁궐을 짓고 몽골군을 막기 위해 성을 쌓아야 했지만 더 힘든 노동은 바다를 메우는 간척사업이었을 것이다.<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살기 좋은 곳을 택할 시에 풍수학적인 지리와 생리 조건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재물이란 하늘에서 내리거나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므로 기름진 땅이 첫째이고, 배와 수레를 이용하여 물자를 교류시킬 수 있는 곳이 다음이다.” 현재의 강화도는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이다. 가구당 경작 토지도 넓다.

예성강과 임진강 그리고 한강이 한데 모여 바다로 흐르는 곳이므로 어족도 풍부하다.이중환이 살았던 18세기의 강화도는 14세기의 강화도와는 많이 다르다. 39년 고려의 수도였던 강화도는 바다를 메운 간척사업을 통해 엄청난 땅을 만들었다. 원래의 강화도는 여러 개의 섬으로 바닷가도 굴곡이 심한 리아스식 해안이었다. 현재 강화도를 보면 둥글고 약간 길쭉한 고구마를 닮았다. 리아스식 해안선이 아닌 완만한 바닷가는 금방이라도 본토와 닿을 듯 가깝다. 갑곶진에서 바라 본 김포를 보면 세계를 평정한 몽골군이 이렇게 가까운 바다를 건너지 못한 것이 의아스러울 정도다.

13세기의 강화, 간척을 하기 전에 강화도의 해안을 상상한다면 바닷가는 가파르고 정강이까지 푹푹 빠지는 갯벌은 끝이 없다. 강화의 갯벌은 밀물이면 물이 먼저 차오르고, 썰물 때는 가장 나중까지 물이 남는 갯골이 허다하다. 몽골은 강화해협을 넘지 못했다.

1246년 최우가 왕을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여섯 개의 상에 칠보(七寶) 그릇을 늘어놓았으며 음식들이 극히 풍족하고 사치스러웠다. 최우가“오늘과 같이 좋은 날이 다시 있겠는가?”하며 자화자찬했다. 최우가 잔치와 풍악을 즐긴 나머지 사람들을 모아놓고 술을 마시는 것이 절도가 없었다.

청자에 담긴 술에 취하고 비단옷을 입고 춤을 추며 놀았을 최우는 강화도에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우울했을까?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