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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특권층 조기교육 - 인격을 앞세운 통치를 위해서 였다

오룡의 역사타파(66)

오룡의 역사타파(66)

조선의 특권층 조기교육 - 인격을 앞세운 통치를 위해서 였다

대한민국 지배층이 가진 강력한 무기는 경제력이다. 이것은 인격과는 너무 먼 거리에 있다. 조선시대 지배층이 가진 무기도 본질적으로는 경제력이었다.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은 노골적으로 경제력을 드러내진 않았다. 자신들이 경제력으로 사회를 지배한다는 인상을 심어주지 않으려고 조심한 것이다. 

그들은 지적·인격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자신들의 통치에 순종하고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는 <한중록>에 사도세자가 받은 조기교육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두 살 때 글자를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쓰셨고, 세 살 때는 다과를 받으시자 목숨 수(壽) 자나 복 복(福)자 찍은 것만 잡수시고 (……) 또 천자문을 배우시다가 사치 치(侈)자와 넉넉할 부(富)자가 나오자, 치(侈)자를 손으로 짚고 당신이 입으신 옷을 가리키시며‘이것이 사치다’라고 하셨다.

조기교육은 왕실뿐만 아니라 사대부에서도 실시되었다. 특권층 가문의 조기교육도 오늘날의 조기교육을 뺨치는 수준이었다. 고종 때 나온 민담집인 <금계필담>에는 김시습이 다섯 살 때 지은 삼각산에 관한 시를 듣고 세종이 감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통상 개화론자였던 박규수의 문집 <환재집>에도 박규수가 일곱 살 때 공자의 <논어>를 읽고 그것을 모방한 문장을 지었다고 한다. 21세기의 우리는 다섯 살짜리가 시를 지었다는 사실과 일곱 살짜리가 <논어>를 읽었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하지만 조선시대 사람들은 다섯 살짜리가 시를 짓는 것과 일곱 살짜리가 유교 경전을 읽는 것 자체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웬만한 사대부 가문에서는 어린 자녀들을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이다.

세살 사도세자가 사치와 검소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한 것을 보면, 조선의 지배층들은 지식을 암기한 것만이 아닌 인격적 소양까지 훈련시켰음을 알 수 있다.

성리학 중심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검소가 미덕이어야 했다.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닌 이상적인 사회를 만들어 가기 위해 권력이 필요한 것이었다.

특권 사대부들이 꿈꾸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기 아이가 어려서부터 지적·인격적으로 일반 백성들과는 다르게 키워야 했다. 그래야만 아이가 훗날 성인이 되어 노비·소작농들을 쉽게 통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도 나라를 유지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치를 과시하지 않은 지배층들의 노련함 때문이다. 노래 잘하는 사람도 멋져 보이지만, 명시를 낭송하는 사람은 또 다른 매력을 준다. 사람 자체를 다시 보기도 한다. 조선시대 지배층들은 어려서부터 시를 짓고 암송하는 훈련을 받았다. 여기에다가 경전까지 줄줄 외우고, 도덕 교육까지 철저히 받았다. 이런 조기교육을 통해 그들은 아랫사람들의 지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로 성장한 것이다. 이런 교육 덕분에 조선의 사대부들은 자신들의 지배가 ‘경제력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인격과 지식에 의한 지배’라는 존중적 존재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었다.

재벌 3세의 행패를 목격한 국민들은 재벌들이 인격적으로 우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돈만 많은 한량들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