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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벽서와 괘서, 그리고 대한민국 대자보와 찌라시

오룡의 역사 타파(67)

오룡의 역사 타파(67)

조선의 벽서와 괘서, 그리고 대한민국 대자보와 찌라시

1547년 9월 18일 양재에 붉은 글씨의 대자보가 붙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여기서 여주는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 윤씨를 말한다. 윤씨는 동생인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장악하고, 1545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벽서에 등장하는 이기는 윤원형과 손잡고 젊은 사림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선 인물이다.

윤원형 일파는 벽서를 권력 강화의 기회로 이용했다.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벽서 사건을 조작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외척과 일부 훈구세력들은 을사사화 때 쫓아내지 못한 선비들을 숙청하고, 20년 동안 독점적 권력을 유지했다. 국가의 기강은 무너졌고, 유랑민은 속출했으며 민심은 흉흉했다. 고리 백정이었던 임꺽정은 백성들의 지지를 받아 3년 동안 왕조를 조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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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대한민국 대학가는 대자보가 넘쳐났다. 1980년 광주에 대해 왜곡과 침묵으로 일관했던 땡전 뉴스에 맞선, 미처 말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대신 전하는 대안언론의 역할을 수행했다. 대자보는 시국을 논하는 매체였다. 나라의 현실을 고민하며 격정을 담아내는 언로였다. 이로 인해 숨겨진 사건들의 실체가 세상에 드러나기도 했다.

대자보를 붙이는 학생들이 감옥에 갈 각오를 해야만 했던 시절에 비해 지금은 인신의 구속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언론이 제 역할을 다한다고도 생각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2013년‘안녕들 하십니까’대자보가 대학가를 휩쓴 지 1년 만에‘최씨 아저씨께 보내는 협박편지’“최경환 학생, 답안지 받아가세요(성적은 F)”등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경제 정책을 비판한 내용도 있었다.

실시간으로 뉴스가 전해지는 시대에 대자보는 80년대 형식 그대로였다. 정치적인 현안이 아니라는 걸 빼면 아날로그 방식이었다. 학생들은‘오늘날 한국 경제 위기의 해결 방법을 쓰시오’라고 시험문제를 출제했다. 최 부총리가 추진 중인 부동산 경기 활성화,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시간제 일자리 확대 정책을 답안으로 채웠다. 채점 결과는 낙제 점수인 F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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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서나 괘서에‘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의 훈민정음이 수령을 고발하거나 비방하는데 자주 활용됐다. 조선 중기 이후 등장한 다수의 한글 벽서는 위장한 양반일 수도 있으나 백성들의 언로로도 활용된 것이리라.

벽서나 괘서를 쓴 자는 교형에 처했고, 본 자는 즉시 소각해야 했다. 관가에 알린 사람은 곤장 80대를 맞았고, 관리가 이를 수리하면 곤장 1백대를 맞았다. 영조는 벽서 쓴자를 잡으면 2품의 벼슬과 상금을 고시하기도 했지만, 벽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판 괘서인 찌라시 외부 유출의 범인을 잡기 위해 대한민국의 검찰은 한 달 동안 일사분란 했다. 분란(紛亂)만 했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