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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도 없이 일한 노비들, 오늘날의 비정규직처럼 언제든지 버려졌다.

오룡의 역사 타파(72)

오룡의 역사 타파(72)

휴일도 없이 일한 노비들,
오늘날의 비정규직처럼 언제든지 버려졌다.

삼국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노비는 단지 말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지배층들은 누구나 노비를 거느렸고,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사고 팔았다.

1398년 7월 6일 태조에게 올린 형조의 보고를 보면“무릇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 값은 400~500필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가축을 중히 여기고 사람을 가벼이 여기는 것이므로 도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원컨대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의 값을 남녀를 논할 것 없이 나이 15세에서 40살까지는 400필로 하고 14살 이하와 41살 이상인 자는 300필로 하여 매매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는 말 한 마리와 노비 열 명을 맞바꿨다. 임진왜란 당시 말 한 마리 값이 은자 열냥 정도라고 했으니 노비 한 명의 값이 은자 한냥에 불과 했던 셈이다. 이처럼 노비는 주인이 맘대로 사고팔 수 있는 동산이었다.

경국대전에는 매매에 관한 규정이 있는데 가옥을 매매하거나 전답을 매매할 때 15일 안에 무를 수 있고 100일 안에 등기를 해야 했다. 그 밑에 작은 글씨로 노비도 또한 이와 같다고 적었다.

재산 상속을 할 때에는 일일이 노비의 숫자를 셈하여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노비들은 주인집의 상속 과정에서 부모 자식 간에 생이별을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19세기에 들어와 노비의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지만 지위와 역할이 변한 것은 없었다. 주인의 심부름을 하는 청지기, 상전이 외출할 때 수행하던 상노, 안방마님의 시중을 들며 이야기 상대를 해주는 안잠자기, 마님의 몸종인 상지기, 밥을 짓는 식모나 찬모, 바느질 하는 침모 등도 여전히 노비의 신분이었다.

다만 행랑아범, 행랑어멈 등이 이 시대에 생겨났는데, 비록 주인집의 온갖 시중을 다 들어주었지만 노비처럼 매매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노비의 신분 상승을 위해서는 역모를 고발한다든가 권력자의 종복으로 공을 세우는 것이 거의 유일했다. 노비 출신으로 가장 출세한 조득림은 원래 세조의 부인인 정희 왕후의 아버지 윤번의 가노였다.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 시에 김종서를 제거하고 안평대군을 역모 사건으로 몰 때 공을 세웠다. 세조는 즉위 후 그를 3등 좌익공신에 임명하는 교서를 내린다.

“충성을 다하여 나를 도와서 이미 비상한 공을 세웠으니 마땅히 차례를 뛰어넘는 은총을 베풀어야 하겠다. 생각건대 그대는 성품이 빼어나고 일을 처리하는데 공경하고 삼가며 어린 나이에 나를 따라서 항상 좌우에 있었으나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해이하지 않고 받들어 순종하는 데 어긋남이 없었다. 충성이 왕가에 있으니 내가 그대의 공적을 아름답게 여긴다. 이에 좌익 3등 공신에 임명하여 그 부모와 처에게도 작위를 내리고 밭 80결, 노비 8구, 백은 25냥쭝 등을 내리노라. 앞으로도 충성을 다하여 나를 섬기도록 하라.”
……대한민국의 비정규직들은 밤낮으로 일해도, 공경하며 순종해도 여전히 미생일 뿐이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