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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73)-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했던 송강 정철

최고의 감성주의자(?)가 남긴 교훈

오룡의 역사 타파(73)

피도 눈물도 없이 잔인했던 송강 정철, 최고의 감성주의자(?)가 남긴 교훈


권력욕의 화신, 암군(暗君) 선조의 충직한 신하,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사내는 구구절절 주옥같은 가사 문학을 남긴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하였다.” 또“정철은 충성스럽고 청렴하고 강직하고 절개가 있어 한결같은 마음으로 나라를 근심했다” 선조 실록과 선조 수정실록에 실려있는 송강 정철에 대한 극단적인 평이다.

1589년 10월, 선조 앞으로 한 통의 비밀 장계가 올라온다. 정여립의 역모를 고발하는 내용이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있던 정철이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니 재판관으로 적당하지 않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선조는 정언신 대신에 정철을 우의정으로 삼아서 재판을 맡겼다.

크게 노한 선조의 마음을 헤아린 걸까. 정철은 역모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된 정여립이 죽은 뒤에도 그와 관련 있는 사람들까지 모조리 잡아들인다. 3년이나 이어진 수사기간동안 목숨을 잃은 사람만 천여 명. 조선 최대의 옥사, 기축옥사다.

조선의 국법에는‘아이와 노인은 고문하지 않는다.’라고 되어 있었지만, 정철은 이발과 그의 80살 노모를 때려죽이고 10살의 아들은 압슬로 죽였다.

기축옥사의 광풍이 지난지 얼마 되지 않아 선조는 돌연 태도를 바꾼다. 호랑이와 독수리의 절개를 가졌다며 정철을 총애했던 선조. 하지만 정철 때문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며 독하고 간사한 정철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그를 강하게 비난한다. 1591년 좌의정까지 올랐던 정철은 파직되어 결국 평안도 강계에 위리안치된다.

이후 다시 복귀되었다가 1591년에는 왕세자 책봉 문제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서 다시 명천으로 유배된다.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선조는 내심 신성군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다시 정철을 불렀고, 정철은 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하고 충청·전라도의 제찰사를 지내기도 했지만 다시 탄핵을 받아 강화도에서 칩거하다가 1593년 12월 병사한다.

어린 시절의 경험 때문인지 권력에 대단히 민감하였고, 정치적 라이벌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던 송강 정철. 그가 귀양을 자주가서 주옥같은 글들을 많이 남긴 것은 대한민국엔 다행이지만, 그가 늦게 죽어서 당쟁이 격화되어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한 것은 조선의 불행이 아닐까.

“정철은 자기와 뜻이 다른 사람을 모조리 잡아 없애고 나라 안에 함정을 파서 사람들을 빠뜨리게 하였다” 이런 식으로 해서 연관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 씌웠던 16세기 조선의 붕당 정치를 닮지 않으려고 오늘도, 역사를 배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세기 대한민국의 법원은 한국사 교과서에 대한 교육부의 수정명령은 적법하다"고 판결했다. 권력의 입맛에 맞지 않는 교과서나 그 내용에 대해 언제든지 수정할 수 있다는 오늘은, 어떤 역사로 기록 될 것인가?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