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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때문에 몸을 팔아야 했던 지은을 효녀로 만들어 준 신라는 왜, 망했을까?

오룡의 역사 타파(76)

오룡의 역사 타파(76)

“금성의 분황사 동쪽 동네에 지은이라는 처녀가 있었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눈먼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지은은 서른두 살이 되도록 시집을 못가고……집이 가난하여 품팔이도 하고, 구걸도 하며 밥을 얻어다 어머니를 모셨다. 어느 해 흉년이 들자 동네에서 밥을 얻기도 어려워 졌다. 생각다 못한 지은은 스스로 부잣집에 몸을 팔아 종이 되기로 하고, 쌀 10여석을 받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전하는 신라 말 정강왕(886년)때의 기록이다. 수도 금성에 살던 지은의 삶이 이토록 힘들었다면 지방민들의 생활은 더 비참했을 것이다.

“지은 모녀를 측은하게 여긴 화랑 효종은 부모에게 청하여 곡식 100석과 옷가지를 가져다주었다. 또 부잣집에 지은의 몸값을 갚아 주고 도로 양민이 되게 하였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정강왕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리고 부역을 면제해 주었다. 또 곡식이 많아서 도둑에게 빼앗길까 염려하여 군사를 보내 지키게 하였다.”

효종은 진골 출신으로 아버지는 각간의 지위에 있었던 신라 최고의 집안이었다. 정강왕은 백성들에게 효를 장려하기 위한 대대적인 홍보를 위해 지은이의 효도를 활용했다. 지은처럼 로또를 받은 행운은 지극히 특별한 경우에 불과하다.

‘삼국사기’ 헌강왕 6년(880)에 보면 이런 기록이 나온다. 9월 9일에 왕이 좌우의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月上樓)에 올라가 사방을 둘러보았는데, 서울(경주)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敏恭)을 돌아보고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는다고 하니 사실인가?”

민공이 “신(臣)도 역시 일찍이 그와 같이 들었습니다. 대왕께서 즉위하신 이래 음양이 조화롭고 비와 바람이 순조로워 해마다 풍년이 들어, 백성들은 먹을 것이 넉넉하고 변경은 평온하여 민간에서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거룩하신 덕의 소치입니다.”

왕이 기뻐하며 말하였다. “이는 경들이 도와준 결과이지 짐이 무슨 덕이 있겠는가?”
헌강왕이 본 것은 지금으로 치면 서울 강남의 풍경이었다. 신라 사람들 대다수가 헌강왕이 본 것처럼 기와집에서 살고 숯으로 불을 땠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헌강왕은 신라 전체가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사실이라 믿고 싶었을지 모른다.

가난 때문에 노비로 전락할 지은에게 곡식을 내려 준 정강왕은 헌강왕의 동생이다. 정강왕은 1년 만에 또 다른 동생인 진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가난은 임금도 구제해 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즉 백성의 게으름이 가난의 원인이 아니라 정치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라 때문에 백성이 가난해진 것이다.

지은이가 하사받은 곡식을 빼앗아 갈 도둑들은 종으로 팔려갈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원래 도둑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진성여왕 시기에 조세와 부역을 견디지 못하고 초적이 되어 난을 일으킨 원종과 애노, 붉은 바지 도적은 반역을 위함이 아닌 먹고 살기 위한 생계형 반란이었다.

백성의 살림살이를 챙겨주지 못한 신라는, 영원할 것 같았던 천년 왕국 신라는, 그들이 하찮게 여기던 지방 호족들에 의해 허망하게 무너졌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