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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80)

일본에 의한 침략 전쟁
-7년간의 전쟁을 ‘임진왜란’이라고 불러야만 하나-

우리가 일본에 대한 원한의 감정을 지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임진왜란이다. 1592년 4월에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7년 동안 한반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명나라를 정벌할 터이니 길을 빌려달라(假道)”는 일본군의 요구로 인해 명나라는 조선이 옛 고구려의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는 의심까지 했다. 그만큼 일본군의 조선 점령 속도가 빨랐기 때문이다.

평안도까지 일본군이 점령하자 1592년 7월초 명군 3천명이 조승훈의 지휘하에 압록강을 건너왔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로 외국 지원군대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명군이 조선 땅에 들어온 뒤 조선 군사들은 뒷전으로 물러났다. 명군이 군사지휘권을 행사한 것이다. 거 350여년 후에 발발한 6.25 한국전쟁 시기 작전지휘권을 미군 중심의 연합군에 양도한 것과 유사하다.  

명은 전쟁을 종결하기 위해 일본과 강화교섭을 벌였다. 조선의 군왕 선조와 실료들은 강화 교섭을 반대하고, 철저 항전을 외치면서 수복 작전을 벌였다. 한국전쟁 시기 정전회담을 반대하며 북진통일을 외친 이승만 대통령과 너무나 흡사하다.

강화 회담 교섭 과정에서 도요토미는 조선의 팔도를 분할하여 경상·전라·충청도와 경기도 일부를 차지하고, 한강 이북의 경기도와 서울과 강원·평안·함경도는 돌려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강화교섭이 무산되는 바램에 할지론은 묵살 되었지만 외국끼리 조선 땅을 분할하려는 논의가 벌어진 것이다.

7년간의 전쟁은 아무런 승패 없이 끝났다. 토요토미가 병사하자 일본군은 떠났다. 일본군이 떠난 조선 땅에 명군은 남아있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만주에서 성장하는 후금군을 의식해야 했다. 임진왜란은 두 나라 군사들이 철수하는 것으로 끝이 났고 인질교환이나 전쟁 책임론도 없었다. 가장 큰 피해 당사국은 전쟁터였던 조선이었다.  전쟁의 실상을 목격한 이수광은 <지봉유설>에 “세상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여자와 어린애들은 마음대로 바깥출입조차 못할 형편이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쌓이면 사람들이 다투어 그 시체의 살을 떼어먹었다”고 기록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 명나라가 망해 가는 조선을 구원하였다 하여 재조(再造)의 은혜, 곧 나라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했다. 조선을 지키기 위해 지원군을 보낸 것이 아닌 자국의 안정을 위해서 보냈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맹목적인 사대 모화사상이 조선을 휩쓴 이데올로기로 작용한 것이다.

 그동안 우리 역사는 이 전쟁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 했다. 곧 “임진년에 일어난 왜군의 난리”라는 뜻이다. 일본에서는 전쟁이 진행되는 시기의 일본 연호인 문록(文祿)과 경장(慶長)의 앞 글자를 따오고 전쟁의 뜻을 담은 역(役)을 붙여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임진동정(壬辰東征) 또는 만력의 역이라 명명하였다.

임진왜란은 동아시아 3국이 수십만 명의 군대가 동원하여 7년간을 싸운 16세기 최대의 전쟁이었다. ‘왜란’이라 부르게 되면 그 실체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일본은 엄연한 실체적 국가이므로 왜구로 불러서도 안된다. 실체를 외면한 역사 용어, 지금 당장 바로잡을 때이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