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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81)

오룡의 역사 타파(81)

광복 70년 -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1909년 12월 22일 오전 11시 명동성당에서 벨기에 황제의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했다. 이재명은 성당 문밖에서 군밤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이완용을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한다 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을 기어이 설욕 신장하리라.”던 이재명은 24살의 나이로 사형 당했다.

“나는 평생 시세를 따라 잘 처신한 덕에 가문을 이만큼 세웠다. 앞으로는 미국이 승할 테니 너는 영어를 배워 두라.”는 이완용은 천수를 누렸다. 예순아홉 살 까지 살다간 이완용의 장례식은 50명의 장례위원들이 엄수했다. 일왕이 하사한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 정2위대훈위후작 이라고 적힌 깃발을 앞세운 장례 행렬은 일본 순사들의 호위 속에 이루어졌다.

이완용은 처세의 달인이라고 해야 한다. 그는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는데 탁월했다. 그는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을 졸업하고 뛰어난 영어실력을 인정받아 주미 조선공사관 참사관으로 근무했다. 유학에 대한 통찰력, 당대의 명필가로 개화파와 수구파와도 친분을 유지했다. 흥선대원군과 사돈간으로 왕실의 일원이기도 했던 그에게 친미에서 친러와 친일로 변절했다는 표현은 억울할 수도 있다. 그 자신은 순리에 따랐을 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연간 쌀 7만5000석을 수확할 정도로 한강 이남의 제일가는 부호였던 장승원에게 대한광복회 총사령관 박상진은 군자금을 요청했다. 돈이 없다며 다시 오라던 그의 신고로 단원들은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얼마 뒤 또 다른 단원들이 장승원을 암살했고, 박상진은 1921년 주범으로 체포되어 사형 당했다.

죽은 장승원에게는 아들이 3명 있었다. 큰 아들 길상, 둘째 직상, 셋째 택상이다. 장길상은 소작인들에게 가혹하게 소작료를 물리고 인심을 잃자 땅을 팔고 대구로 옮겨 선남상업은행, 대구은행의 대주주가 된다. 장직상은 대구상공회의소 회장에 이어 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오르는 등 출세 가도를 달리면서 온 정성을 다해 친일 행각을 벌였다. 1947년, 의열단 단장이며 광복군 부사령을 지낸 김원봉이 노덕술에게 체포된다.

1923년 의열단원 김상옥이 폭탄을 투척하고 1000여명의 경찰대와 접전을 벌인, 식민치하 독립 운동가에게 악명 높은 종로경찰서에는 여전히 친일 경찰들이 있었다. 종로경찰서로 끌려간 김원봉은 악질 친일 경찰 출신인 노덕술에게 뺨을 맞는 모욕을 당한다. 일제가 최고의 현상금을 걸고도 잡지 못한 김원봉은 해방된 조국, 남한을 떠났다.

김원봉의 고모부는 대한광복회의 창립 일원이었고, 김원봉의 체포를 지시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장승원의 막내아들이었다.

지난 2006년 이승만의 양자인 이인수와 함께 KBS의 주말드라마 《서울1945》가 이승만과 장택상의 명예를 훼손하는 등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던 장병혜는 장택상의 딸이다.

19세에 미국으로 유학간 그는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세 자녀를 모두 하버드대, 예일대 등 명문대학에 진학시켰다. 그가 쓴 <아이는 99% 엄마의 노력으로 완성된다>는 책은 지난 2003년 베스트셀러였다.

광복 70년, 역사는 그냥 흐르고 있을 뿐이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