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맑음동두천 25.5℃
  • 맑음강릉 20.4℃
  • 맑음서울 26.4℃
  • 맑음대전 27.3℃
  • 맑음대구 28.8℃
  • 맑음울산 26.3℃
  • 맑음광주 28.6℃
  • 맑음부산 23.8℃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1.8℃
  • 맑음강화 23.7℃
  • 맑음보은 26.6℃
  • 맑음금산 27.1℃
  • 맑음강진군 28.8℃
  • 맑음경주시 29.9℃
  • 맑음거제 28.2℃
기상청 제공

오룡의 역사 타파(82)"

오룡의 역사 타파(82)

1636년 병자호란 - 나라는 망해가는데 명분을 고집하는 주전파에게 백성들은 무슨 존재였을까

7년간의 임진왜란이 끝난 17세기 초의 동아시아 정세는 급격하게 요동쳤다. 만주 일대에서는 만주족이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압박했다. 도요토미 가문을 전멸시킨 도쿠카와는 국내 안정을 위해 조선과의 교역 재개에 사활을 걸었다. 조선의 15대왕 광해는 발군의 외교력으로 전쟁의 상처를 극복해 나갔다.

문제는 광해군을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외교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무렵 조선의 지배층은 명나라에 대해 재조자소(再造字小: 다시 나라를 만들어주고 작은 것을 사랑해준 은혜)의 의식이 팽배했다. 특히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서인들은 실리외교를 모조리 뒤엎었다.

1636년 12월,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바꾼 홍타지(청 태종)는 전면적 침략을 단행했다. 12만 명의 팔기군은 질풍처럼 달려와 6일 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꼼짝도 못했고, 백성들은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산성에 고립된 조선의 왕과 권력자들은 항전하여 죽느냐, 항복하여 사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김상헌은 최명길이 작성한 항복문서를 찢으면서 유교적 대의명분을 살리려 했고, 최명길은 일단 항복을 하고 후일을 도모하자고 주장했다. 명분과 실리를 두고 맞섰던 주전파와 주화파의 논쟁에서 주화파의 주장이 채택된다.

인조는 삼전도로 나가 청의 태종 앞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올리며 항복했다. 조선이 항복한 후 8년 후에 명나라는 멸망했다. 대륙의 주인이 바뀐 17세기 중반이후부터 조선은 극단적인 보수이념으로 회귀하기 시작했다. 청나라에 증오감을 드러내며, 존화(尊華)의식에 사로잡혀 멸망한 명나라의 연호를 쓰기도 했다.

병자호란시의 주화파들에게는 불구대천의 오랑캐와 타협했다하여 매도했다. 주화파는 대의명분을 저버린 소인들의 무리로 몰아갔다. 주화파들은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탄압을 받았다. 성리학의 불통적인 교조성은 결국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18세기 후반에 청나라의 실질적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을 배워야 한다는 박지원과 박제가의 주장은 외면당했다. 이들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 오랑캐도 문화적으로 수준이 높게 되면 중화가 될 수 있다고 탑골 공원에서 길거리 강의를 했지만 소수 그룹에 지나지 않았다.

시대는 급변하는데 오래된 관념과 몽롱한 의식 속에 빠진 조선의 지배층은 허우적 거렸다. 민심을 외면한 정치는 끝모르게 후퇴하더니 결국은 세도정치로 이어졌다. 척화를 주장한 노론들은 조선이 망한 후에 조선총독부에서 포상한 76명 중에서 소속당파를 알 수 있는 64명 중에 56명을 차지한다.

만약에 그들 중의 일부가 유전되어 남북긴장 국면을 조성하는 인물군속에 있다면 공포스럽다. ‘노인이 전쟁을 결정하고 젊은이가 전쟁터에서 죽는것’은 역사 이래 계속된 진실이다. 국가를 지키기 위한 명분을 내세워 전쟁을 일으킨 권력자들 중에 전쟁터에서 싸우다 죽은 사람은 거의 없다.

권력을 지키기 위해 명분에 집착했던, 나라는 망했는데 훈장을 받고 기뻐한 서인과 노론의 망령이 이 땅에 남았을리는 없을텐데 뭔가 찜찜하다.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