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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타파

오룡의 역사 타파(83)

백성을 위한 나라는 없었다 - 망해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사람중에 지식인이 있었던가?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군대가 해산된 1905년부터 1909년 사이의 의병투쟁은 가열찼다. 전국 각지에서 다양한 계층의 의병들이 봉기했지만 애국 계몽주의자들인 지식인들은 다수가 외면했다. 이들은 ‘지금은 헛되이 목숨을 버리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만들때가 아니라 본업을 지키면서 실력을 길러 후일을 기약하라’며 의병들을 질책했다.

전 재산을 팔아 만주로 이주하여 삼원보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새운 이회영 형제와 이상룡처럼 무장 투쟁론을 강조한 지식인은 소수였다. 의병들을 흉도라며 비난했던 계몽 지식인들의 대다수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인정하고 굴복했다. 그들은 실력 양성운동을 외쳐댔다. 언제까지 실력을 키울 것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에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했다. 안중근의 행위는 국격을 떨어뜨리는 만행이라고 맹렬히 비방했던 대한제국의 지식인들은 진사(陳謝) 사절단을 일본에 파견하며 사죄했다. 3일 동안 음주가무는 금지되고 대한제국은 비통함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1932년 10월 26일 남산기슭 장춘단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사찰 박문사를 지었다. 사찰이 지어진 언덕은 춘무산이라 불렀다. 박문사라는 이름은 이토의 이름 이등박문(伊藤博文)에서 따왔고, 춘무는 이토의 호였다. 장충단은 본래 을미사변 때 피살된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궁내부대신 이경직 등을 기리기 위해 대한제국 고종이 쌓은 제단이었다. 대한제국의 국립묘지를 허물고 그 자리에 이토의 사당을 지은 것이다. 박문사의 낙성식에는 이광수, 최린, 윤덕영 등이 참석했다. 그들은 애국 계몽주의자이며 지식인들 이었다.

3·1 만세운동에는 2백만명의 조선인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서슬퍼런 무단통치앞에서 만세를 외치다 죽어간 8000여명의 조선인들의 다수는 평범한 백성이었다. 3·1운동 당시에 대중을 사지(死地)에 몰아넣고 발뺌을 한 소위 민족대표들인 기회주의적인 지식인들이고 ‘냉정하게 사태를 직시하며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한 이완용은 냉철한 지식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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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역사의 자료는 다수가 지식인들이 남겨놓은 것이다. 자료의 객관성을 이유로 그들이 남긴 자료만 가지고 역사를 본다면 민중은 어리석은 존재라고 인식할수 있다.

일제 식민치하의 통계는 근대적인 행정력을 발휘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믿을 수 있지만, 한국 민중의 증언이나 기록은 감정적인 내용들이 많다고 주장하는 이들을 보면 백년전의 계몽주의 지식인의 시각이 느껴진다.

망국의 조선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의병들, 식민지 조선의 독립을 위해 만세를 외친 사람들은 지식이 아닌 용기가 있었기에 일어선 것이다. 용기가 없었던 지식인들의 지식은 식민지 백성을 착취하는 이론을 제공했을 뿐이었다.

역사 바로 잡자고 부산을 떨고 있는 일부 지식인들의 난데없는 용기로 만들어지는 역사교과서 국정화는 누구를 위해 서두르는 걸까.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