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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84)

오룡의 역사 타파(84)

효종의 북벌과 송시열의 북벌은 다르다-역사의 왜곡을 통해 300년을 지배하다.

1637년 삼전도에서 조선은 청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조선이 그토록 사모하던 나라 명나라는 농민군인 이자성에게 멸망했다. 명의 숭정제는 자금성이 함락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랑캐라고 생각한 청은 17세기 중반이후 동아시아의 최강국가로 중원을 장악했다.

‘청이 재편한 동아시아의 국제질서에 편입된 조선은 북벌을 준비한다. 그 중심에 효종(재위 1649~1659)과 송시열과 서인이 있다.’고 한국사는 말한다. 10년 재위 기간은 북벌을 위한 절치부심의 준비 기간이라고 가르치는 역사교육의 현실은 두 차례의 나선정벌(1654년, 1658년)과 병렬로 마주서있다. 극적인 타협은 북벌을 위해 준비한 조총수들에게 실전 감각을 쌓기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효종의 북벌정책이 사실이라는 근거는 송시열과의 단독회담(기해독대)이다. 이 회담의 요즘 버전은 대통령과 여당 대표의 회담이다. 1659년 4월, 효종은 풀리지 않는 정치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서인의 영수였던 이조판서 송시열을 사관도 없이 만났다. 당시 효종이 추진하는 중앙군 확충 정책에 반대하는 서인을 설득하기 위한 효종의 승부수였다. 중앙군을 확충하자면 세금을 더 거두어야 했고 그러자면 집권층인 서인들이 돈을 더 많이 내줘야 했기 때문이다. 사관이 기록하지 못한 두 사람의 회담 내용은 송시열의 글을 모은 <송서습유> ‘악대설화’에 실려 있다. 효종은 자신이 군비를 증강하는 목적은 실은 북벌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며 “10년만 준비하면 청나라를 꺾을 수 있으니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효종이 북벌론을 입에 담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송시열은 “전하의 뜻이 이와 같으시니,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실로 천하 만대의 다행”이라면서도 “만에 하나 차질이 있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 어찌하시렵니까?”라고 한발 물러섰다.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한 송시열을 효종은 집요하게 설득한다. “하늘이 내게 10년의 기간을 허용해 준다면 한번 거사해볼 계획이니, 경은 은밀히 동지들과 의논해보도록 하시오.” 송시열의 반응은 마찬가지였다. “신은 결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셨다면 전하께서 신을 너무 모르시는 겁니다.” 요즘 말로 하면, 대통령이 “전시작전권을 빨리 돌려받읍시다.”라고 하자 여당 대표가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라고 답하는 식이었다. 송시열은 북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효종의 군비강화는 왕권강화를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독대 이후 3개월도 안되어 효종은 갑자기 승하한다. 그러므로 효종과 송시열의 독대를 근거로 북벌을 운운하는 것은 근거가 매우 취약하다. 북벌론은 효종이 살아 있을 때는 물론 죽은 뒤에도 15년 동안 공개적으로 표출된 적이 없었다. 회담 내용이 세상에 공개된 것은 현종 15년(1674)이었다. 2차 예송논쟁으로 정치적 위기에 몰린 송시열의 승부수가 통한 것이다.

효종의 재위기간에 청나라는 최고의 황제 순치제와 강희제가 있었다. 초강대국 청나라를 공격하겠다며 공식적으로 북벌을 추진할 상황이 아니었다. 다만 효종은 송시열과의 독대를 통해 북벌을 입에 담은 적이 있었다. 그 독대의 스토리를 작성한 작가는 송시열이다.

송시열이 효종과 함께 북벌을 추진했다는 것은 조선후기 200년의 권력을 장악한 서인 노론 세력들의 왜곡된 역사 해석은 아닐까?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