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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85)

오룡의 역사 타파(85)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는 김수영과 “두려운 것은 역사뿐이다.” 라던 연산군을 생각하다.


단군의 고조선 건국은 석기문명을 대체하는 청동기 문명의 탄생 과정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금속을 다룰 줄 알았던 외지인들이 현지 세력들과 결합해 가는 과정을 토템 신앙을 이용하여 설명한다. 양 세력 간의 갈등을 통합하고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된 단군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은 옛날부터 많았다.

단군의 건국신화 뿐만아니라 모든 신화는 허구로 가득 찬 이야기이다. 허구 속에 은유적인 해석을 해야만 진실에 가까운 내용들을 유추해 낼 수 있다. 근대에 와서야 허구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가려내는 작업들이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재발견의 의미도 생겨났다. 단군은 더 이상 허구의 존재가 아닌 기록으로서 존재하는 우리 역사 최초 국가 고조선의 건국자이다.

‘이번에 편찬한 실록은 모두 가언(嘉言)과 선정(善政)만이 실려서 다시 고칠 것도 없으려니와 하물며 전하께서 이를 고치시는 일이야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도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하여 그 사실을 반드시 다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하겠습니까?’

1431년, 태종실록의 편찬을 명했던 세종은 부왕의 기록들을 보고 싶어했다. 이에 우의정 맹사성은 다음과 같이 간언한다. 이에 세종은 자신의 생각이 경솔했음을 뉘우치고 실록을 보지 않았다. 이후로도 세종은 또 한번 실록 열람의 필요성을 역설했으나 황희, 신개 등의 반대로 열람하지 못하고 두 번 다시 실록을 열람하려 하지 않았다.

세종의 입장에서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을 척살하고,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세자였던 이복 동생을 죽였으며, 친형을 귀양보내고 왕위에 오른 아버지 태종에 대한 사관들의 평가가 궁금했을 것이다.
생모인 폐비윤씨의 죽음을 이유로 일으킨 갑자사화는 실록을 연산군이 직접 본 것이 아니다. 성종실록을 편찬하면서 모아놓았다 세초되지 않은 일기와 사초를 보고 일으킨 것이다. 그마저도 사초의 전부가 아닌 일부 내용을 간추린 것이었다.

연산군의 갑자사화로 인해 조선의 사관과 사초는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연산은 군주의 과실은 아예 사초에 기록하지 못하게 했으며 입시사관은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로만 임명했다.

이른바 춘추필법에 입각한 역사시술 방식이 무너지고 말았다. 춘추필법이란 사건을 기록하는 기사(記事), 직분을 바로잡는 정명(正名), 칭찬과 비난을 엄격히 하는 포폄(褒貶)의 원칙으로 여기에 어긋나는 것은 철저히 배격했다. 오직 객관적인 사실에 입각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집필하였다. 즉 대의명분에 입각하여 준엄하게 기록하기 위해서는 외압에도 굴하지 않아야 한다는 공자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다.다양성의 시대를 살고 있는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사상 통일이 강제되기 시작했다. 국정교과서에 나오는 역사만이 진실이라면, 이승만을 비판하는 김수영의 시는 거짓된 자료란 말인가.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민주주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올바른 교과서라고 발행되는 2017년 역사교과서에 4·19는 혁명으로 남을 것인가?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