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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86)

오룡의 역사 타파(86)

‘사단(四端)이란 사물의 이(理)에 해당하는 마음의 본연지성(本然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고, 칠정(七情)이란 사물의 기(氣)에 해당하는 마음의 기질지성(氣質之性)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당대 사림 선비들의 표상이었던 퇴계 이황이 성리학에 대하여 정리한 말 중의 하나다.

1559년, 58세의 성균관 대사성(현재의 서울대 총장) 이황에게 32세의 신출내기 과거 급제자였던 고봉 기대승은 이의를 제기했다.

역사에 등장하는 ‘사단칠정’ 논쟁의 시작이다. 받아주지 않아도 될, 받아주지 않으면 논쟁이 성립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편지를 통한 논쟁을 8년간 지속했다. 격렬하면서도 심오했던 논쟁에서 퇴계는 나이와 권력을 앞세워 고봉을 압박하지 않았다. 26년의 나이차는 이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느누구도 기대승이 윗사람에게 대드는 ‘건방진 젊은 녀석’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임금이라면 임금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하며, 부모라면 부모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한다. 연장자 역시 연장자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만 연장자이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연장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유학의 정명(正名)을 실천한 논쟁이었다. 즉 정명이란 이름에 걸맞은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퇴계와 고봉의 ‘사단칠정’ 논쟁에서 논쟁보다 정명을 배워야 한다. 논쟁의 당사자인 이황과 기대승 두 사람은 비록, 치열하게 자신의 주장을 개진해 나갈지언정 항시 예의를 잊지 아니하고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아 후학들에게 순수한 학자적 양심과 철저한 학구적 태도의 모범을 보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서로를 존중했던 8년간의 논쟁은 결국 이황의 내용 수정으로 마무리 됐다.

1572년, 기대승이 한양을 떠나는 날, 수많은 선비들이 모였다. 한 선비가 기대승에게 물었다. “사대부로서 사회에 몸을 세우고 처신함에 반드시 명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기대승이 짧게 답했다. 기(幾), 세(勢), 사(死) 세 글자면 충분하다. ‘나아가고 물러남에 있어서는 먼저 기미를 살펴 의리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하고, 나아가 시세를 알아서 구차하게 되는 걱정을 없게하며, 마침내 목숨을 걸고 도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이 그 다음이며, 임금은 가장 가볍다.”는 맹자의 주장이나, “아랫사람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라.”는 공자의 가르침은 민본주의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다.

조선후기에 변질된 유학은 권력자들의 지배 구조 강화를 위한, 지배층의 입맛에 맞게 수정된다. 지배층의 집권 도구로 전락한 유학에서 정명(正名)은 사라졌다. 극단적인 ‘장유유서’ 만이 남은 자리에 ‘상명하복’이 ‘예의범절’로 굳혀졌을 뿐이다.

변질된 유학은 시대의 흐름을 수용하지 못했고, 5백년 사직을 이어 온 유학은 일제의 총칼앞에 속절없이 허약했다. 군국주의와 결합한 ‘상명하복’은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총동원령’ 공표와 더불어 주입과 암기의 교육을 강화했다. ‘안되면 되게하라’는 군국주의 망령을 일제가 남겨놓은 유산이라면 지나칠까?

아, 지금이 어느때인가. 문민정부 출범 4반세기의 이 땅에 정명(正名)은 요원하고 ‘상명하복’은 여전해 보여서 하는 말이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