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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87)

오룡의 역사 타파(87)

미국과 맞장 뜬 용감한 조선, 죽음으로 맞선 무명용사 들만이 진정한 애국자였다.


1871년 6월, 미국의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가 5척의 군함을 이끌고 강화해협에 나타났다. 손돌목 인근을 오가며 해안을 측량하는 미군에게 경고포격이 가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초지진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한 1230명의 미군은 광성보에서 어재연을 비롯한 500여명의 조선군과 충돌했다.

전투의 결과는 참담했다. 신식무기로 무장하고 남북전쟁을 통해 전투력을 키운 미군에게 조선군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 미군이 남긴 기록에는 조선군 사살 243명, 익사 100여명, 포로 20여명 이었지만 <고종실록>에는 53명이 전사했다고 쓰여있다. 이처럼 사상자의 규모가 커진 이유는 조선군의 격렬한 저항 때문이었다. 탄환이 떨어진 병사들이 돌과 흙을 뿌리며 끝까지 싸웠다.
미군 윌리엄 그리피스가 남긴 기록이다.

흰옷을 입은 243명의 시체가 성채 안과 주변에 누워 있었다. 그들 중 다수는 이제는 다 밖으로 튀어나온 흩어진 솜 갑옷을, 아홉 겹으로 솜을 두른 갑옷을 입고 있었다. 살이 타는 역겨운 냄새가 공기중에 진동했다. …… 어떤 부상자들은 자신의 고통보다 미국인 체포자들을 더 끔찍이 두려워하며 서서히 불에 타 죽어 갔다. ……

광성보를 점령한 미군에게 풍토병이 발생했다. 식량은 물론 식수마저 부족한 가운데 부상자 2명마저 사망하자 미군은 전의(戰意)를 상실했다. 사상자가 1명에 불과했음에도, 미군은 한양으로의 진격을 포기했다. 보급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예상치 못한 조선군의 저항에 너무 많은 탄약을 써버린 것이다.

애초에 미국의 목표는 군사적 점령이 아닌, 제너럴셔먼호 사건에 대한 책임을 명분으로 개항을 요구하기 위한 무력시위였다. 희생을 감수 하면서까지 조선을 개항시킬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미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했다. 이 전투에 대한 미국 신문의 헤드라인은 이렇게 쓰여졌다. ‘Our little war with the heathen(이교도와의 작은 전쟁)으로 48시간 만에 끝났다.

1854년 군함을 보내 함포사격만으로 에도막부를 쫄게 해 개항시킨 검은배, 미국의 이양선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떠났다. 로저스는 막대한 돈을 쓰고도 조선을 개항시키지 못했다고 질책을 받았고, 흥선대원군은 척화비를 세워 승리한 전투라고 광고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신미양요를 승리한 전투라고 말하기엔 쑥스럽다. 인천부사 구완식이 화성유수 신석희에게 답한 글은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초지진이 함락된) 그 다음날 신시 이후에 저놈들은 광성진으로 방향을 돌리고, 선상에서 포를 난사하니 군심에 어둠이 드려졌습니다. 육지에 내려 배를 대고, 내린 후에 관군의 위아래를 포위하고 서로 도울 수 없게 하니, 중군과 적이 세 차례 혼전을 벌였는데, 끝내 순절한 사망자가 백 여 명에 이르렀습니다. 저놈들은 시신을 모아 태우고 훼손하여 시체를 분별할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조선이 미국과 싸운 최초이자 최후의 전투였던 신미양요. 수백여명의 조선군이 전사한 싸움을 단순하게 서양세력의 소요 사태(洋擾)로 축소하지 말자. 새로운 역사용어를 부여하고 싶다.‘조·미 전쟁’,‘한·미 동맹’에 걸림돌이 될 것 같다고….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