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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88)

오룡의 역사 타파(88)


친일에 대한 확신범, 그들에게서 반성문은 없다. 자기 합리화만 있을 뿐이다.

잡지 <개벽>, 1922년 5월호에 춘원 이광수는 작심하고 글을 썼다. “거짓되고, 공상과 공론만 즐겨 나태하고 서로 신의와 충성이 없고, 일에 임하여서는 용기가 없고, 이기적이어서 사회 봉사심과 단결력이 없다.”

그는 우리 민족의 식민지 전락은 열등한 민족성에서 기인된 것이기에 조선민족을 ‘개조’해야 한다는 <민족개조론>을 주장했다. 그가 주장하는 ‘개조’된 인간의 특징은 ‘국가에 대해서는 모든 임무를 다하는 완성된 범인(凡人)’이다. 일본의 통치에 적극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며,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 개조된 인간이라는 것이다.

1924년 동아일보에 발표된 <민족의 경륜>에서 “조선 내에서 허락되는 범위 안에서 정치적 결사를 조직해야 한다.”고 말했다. ‘해외를 떠돌아다니며 헛되이 독립을 꿈꾸거나, 단지 감옥에 들어갔다’ 오는 독립 운동가들을 과소평가한 그는 식민지의 독립이 아닌 ‘자치론’만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1940년 2월 12일부터 본격화된 창씨개명은 식민지 조선을 ‘내선일체’의 하나로 총독부가 조선인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한 것이다. 그날 아침 관공서가 문을 여는 시각을 기다려 가장 먼저 달려가 등록을 마친 사람은 조선 최고의 작가라는 이광수였다.

“내가 향산(香山)이라고 일본적인 명으로 개명한 동기는 황송한 말씀이나 천황어명과 독법을 같이하는 씨명을 가지자는 것이다. 나는 깊이깊이 내 자손과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香山光浪)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일본 이름으로 개명한 이광수는 확신범이 된 것이다. 그는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게 살기 위해 창씨 개명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광수는 조선 학생들에게 학병을 지원할 것을 권유하는 강연단을 조직하여 전국 순회 강연은 물론 최남선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서 조선인 유학생들을 상대로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48년 반민특위에 체포된 이광수는 최후 변론에서도 다음과 같은 자기합리화를 주장했다. “해방이 1년만 늦었어도 조선 사람들은 황국신민의 대우를 받았을 것입니다. 창씨개명 안한 사람, 신사참배 안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됩니까? 우리 국민은 문맹자도 많고, 경제자립도 어려워 일본과 싸워 이길 힘이 없습니다. 나는 민족을 위해 친일했소. 내가 걸은 길이 정경대로(正經大路)는 아니오마는 그런 길을 걸어 민족을 위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주오.”

반민특위에서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문제는 괴로운 일이다. 좋은 일과 즐거운 일은 자랑할 만하지만 아픈 일과 괴로운 일은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는 분명 자랑할 내용은 아니다. 자랑하지 못하는 과거를 잊으려는 민족에게 미래의 교훈도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역사는 자랑을 위한 현재가 아닌 교훈을 위한 미래이기 때문이다.

춘원 이광수의 최후 변론은, 자기 합리화의 날개를 펴기 시작한다. 이제 한국사에서 교훈도 사라질 모양이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경기도립 중앙도서관·강남대 평생교육원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