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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89)

오룡의 역사 타파(89)

“현모양처라 불리는 사임당 신씨, 그녀를 독립된 여성으로 다시 해석하라.”

사임당 : “제가 죽은후에 당신은 재혼(再婚)하지 마시오. 우리가 7남매를 두었으니 더 구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 그러니 <예기>의 교훈을 어기지 마시오.”

이원수 : “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이오?”

사임당 : “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리를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난을 갔는데 부인이 따라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자가 부인과 동거하지 않았다 뿐이지 내쫓았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원수 : “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사임당 : “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부인이 배를 잘못 쪄서 부모에 대한 도리를 다하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이 내보낸 것입니다. 그후로 증자는 새장가를 들지는 않았습니다.” “ 주자 나이 47살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은 장가들지 않아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는데도 말입니다.”

남편인 이원수에게 자신이 죽은 후에 재혼하지 말라고 당부하는 사임당은 공자와 주자의 고사를 인용하며 논리적으로 대응한다. 남편의 말에 순응하는 ‘양처’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4살에 공부를 시작하였고, 7살에 그림을 그렸던 사임당의 재능은 학문과 예술 분야만이 아닌 정치적인 감각에서도 탁월했다. 이원수가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당대의 권세가인 우의정 ‘이기’에게 부탁하려는 것을 반대했다. 1545년 ‘이기’는 을사사화로 몰락했으니 사임당의 판단은 정확했던 것이다.

술을 좋아한 이원수는 주막집 여주인 ‘권씨’를 첩으로 삼았다가 사임당 사후에는 집으로 데려와 살았다. 장남인 ‘이선’과 비슷한 나이였던 권씨로 인해 집안은 조용할 날이 없었다. 사임당의 3년상이 끝나자마자 집을 가출(?)해 금강산으로 들어간 3남 이이의 방황은 아버지 이원수의 행동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홉 번을 장원 급제시킨 율곡이이의 모친으로, 성리학에 대한 식견조차 부족했던 이원수의 부인으로, ‘현모양처’의 상징으로 박제화 된 사임당은 진정한 의미의 사임당이 아니다.

“이것은 고 증찬성 이공 부인 신씨의 작품이다. 그 손가락 밑에서 표현된 것으로도 혼연히 자연을 이루어 사람의 힘을 빌려서 된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하물며 오행의 정수를 얻고 또 천지의 기운을 모아 참 조화를 이룸에는 어떠하겠는가? 과연 율곡 선생을 낳으심이 당연하다.”는 <사임당화란발>의 발문을 쓴 송시열의 의도는 분명해 보인다.

조선후기 성리학의 교조화를 확립하여 출가외인과 남존여비를 굳건히 하려는 서인들이 사임당을 격상시킨 이유는 독립된 개인으로서의 사임당의 인정이 아니다. 서인의 계보를 잇고있는 노론에게 율곡이이는 상징적인 인물이었으니 사임당은 그 부속품으로 주변인화 하고자 한 것이다. 정치적인 인물로 변질된 사임당의 현모양처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자식에게 어진 어머니’로 제한되어야만 했을 것이다.

정치적인 계산에 의해 제작되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 논란 속에 지상파 방송사의 사임당 드라마 제작에서 그려질 그녀의 모습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