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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90)

오룡의 역사 타파(90)



매천 황현, 그는 애국적 보수주의자 였지 고루한 양반은 아니었다.



“나는 죽어야 할 의리는 없다. 다만 국가에서 500년이나 선비를 길러왔는데, 나라가 망할 때에 국난을 당하여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어찌 원통치 않은가?” 내가 위로는 하늘로부터 타고난 양심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평소에 읽은 글을 저버리지 않고 영원히 잠든다면 참으로 통쾌할 것이니, 너희들은 너무 슬퍼하지 말거라.”

1910년 8월29일, 5백년 왕조의 역사는 허망하게 몰락했다. 황현은 ‘절명시’4수를 남기고 음독 자결한다. 그는 9월 8일 ‘절명시’와 유서를 쓰기 시작하였고, 9일 소주에 아편을 타서 마시고 다음날인 10일 사망했다. 이때 그의 나이 56세였다.

황현은 평생 벼슬하지 않았지만, 젊은 시절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 그는 28세때 보거과(保擧科)에 응시했다. 보거과는 뛰어난 인재를 추천받아 시험을 치르는 별시다. 그는 초시에서 1등으로 뽑혔지만, 시험관은 그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정했다. 민씨세력의 부패를 절감한 그는 그 뒤의 시험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3년 뒤 황현은 가족과 함께 구례로 이주했다. 2년 뒤 황현은 아버지의 강권으로 다시 상경해 생원시에 응시했고 장원으로 합격했다.

33세의 생원 황현은 갑신정변 이후 나타난 정치적 부패와 혼란에 실망하고 1890년에 다시 구례로 돌아왔다. 그는 그곳에 구안실(苟安室)이라는 작은 초가집을 짓고 학문 활동과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구안’은 “넉넉하지는 않지만 편안하다”는 의미다. 매천이라는 자호도 이때 나왔다. 그는 거처의 우물가에 매화를 심고 자호를 지었다.

지리산에 은거했던 황현이지만 세상을 향해서는 늘 열려 있었다. 사료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 <매천야록>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정치권력을 잡을 때인 1864년부터 시작하여 대한제국이 망할 때(1910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했다. 강직한 선비였던 그는 <매천야록>에서 이 시기를 식민지로 가는 과정이었다고 지적하고, 책의 맨 앞에서 당쟁의 폐해를 논하고 사대부의 타락한 모습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황현은 자신의 직접적인 견문과 여러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들은 자료를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주요 내용으로는 고종과 명성황후,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주요 정치 세력의 동향과 문제점, 일본을 중심으로 한 외세의 침탈, 민족의 저항 등을 다루고 있다. 그는 대원군은 공로와 잘못이 절반씩이라고 평가했으며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해서는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나 그도 양반 유생으로서의 세계관은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일까? 갑오 농민 전쟁은 지배층의 부정부패로 인해 발생한 것임을 지적하면서도 농민군의 행동을 반역으로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천야록>은 붓끝의 엄정함, 풍부한 자료의 수집과 인용, 뛰어난 문장으로 고종시대의 역사책이 갖는 한계를 보완해주는 한국근대사의 귀중한 자료임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