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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93)

오룡의 역사 타파(93)

청산하지 못한, 청산하지 않은 역사의 반복- 전쟁을 일으킨 그들은 살아 남는다.

1592년 4월13일, 700척의 왜선이 부산포에 상륙한다. 제1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끈 1만 8000여명의 왜군에게 부산진과 동래성이 무너졌다. 동래성을 지키고 있는 부사 송상현에게 전즉전의 부전즉가도(戰則戰矣 不戰則假道 )를 요구한다.

즉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 달라.’ ‘명나라를 치러가는데 필요한 길을 열어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의 시작이었다. 이에 송상현은 전사이 가도난(戰死易 假道難) 이라고 쓴 나무판을 세웠으니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동래성을 지키던 군관민 3000여명은 철저하게 학살당했다.

이후부터 경상도를 지키는 조선군은 없었다. 왜군의 상륙은 순조롭게 이어졌다. 제2군은 가토 기요마사 2만 2800명, 제3군은 구로다 1만 1000명, 제4군 모리 1만 4000명, 제5군 후쿠시마 2만 5000명, 제6군 고바야가와 1만 5000명, 제7군 모리 3만명, 제8군 우키다 병력 1만명, 제9군 하시바 1만 1500명으로 구성된 왜군의 육군은 15만 8700명으로 정규 병력이었다. 그밖에 구키·도토 등이 인솔한 수군 9000명이 승선하여 해전에 대비했고, 구니베 등이 이끄는 1만 2000명이 전쟁을 전후하여 바다를 건너 후방 경비에 임하였다.

계획된 침략을 물샐틈없이 준비한 왜군에게 조선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조선의 국방 정책은 임시 기구였던 비변사를 상시 운영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충주에서 신립의 8000여 군대가 무너지자 선조는 백성들 몰래 북쪽으로 도망쳤다. 조선의 운명은 사대의 나라로 섬겼던 명나라에 달렸다. 조선은 이미 자주국방을 포기했고, 전시작전권 조차 명나라에 넘겨줘 버렸다.

이후부터 7년 동안 계속된 전쟁으로 조선의 농토는 황폐화 됐고, 백성의 삶은 생지옥으로 변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굶주림으로 죽어나갔고, 수십만의 포로들은 이탈리아까지 팔려 나갔다.

계속된 전쟁에 지친 명나라와 일본은 1593년부터 휴전 협상에 나선다. 조선은 협상단에 들어갈 수 없었고, 명의 심유경과 일본의 도요토미를 대신한 고니시가 지루한 협상을 계속했다. 도요토미는 심유경에게 명나라의 황녀를 왜왕의 후궁으로 줄 것, 무역을 재개할 것, 조선 8도 중 4도를 일본에게 이양할 것, 조선 왕자와 신하 12명을 인질로 보낼 것을 요구한다.

조선의 영토를 놓고 명과 일본이 협상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조선에겐 발언권의 기회조차 없었다. 결국 조선은 일본의 대륙진출을 시험하는 무대로, 명나라가 전쟁의 참화를 막기 위한 완충지의 역할을 훌륭하게(?) 완수해 낸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수를 누렸다. 백성을 버린 선조는 목숨도 구했고 왕위도 끝까지 지켰다.

한반도의 긴장 고조를 원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긴장은 오래갈수록 하수책이다. 역사는 한 번 가르쳐 준 것을 잊어버린 이들에게 관대하지 않을 것이다.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