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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94)

오룡의 역사 타파(94)

광해군의 외교 감각에서 오늘을 본다 - 민족적 자존과 국가의 이익을 위한 탁월한 리더쉽이 필요하다.

1619년 3월2일, 도원수 강홍립은 1만 4000여명의 조선군을 이끌고 만주의 심하에 도착했다. 군량 보급로도 확보하지 못할 만큼의 강행군을 요구하던 명군은 자체 식량도 없었던 지 주변 부락을 약탈하다가 후금군 3만명에게 무너졌다.

철기(鐵騎)라 불리던 만주족의 기마대는 허겁지겁 달려 온 조선군을 몰아쳤다. 좌우를 유린하는 기마대에게 화포는 더뎠고, 총은 느렸다. 굶주림으로 지친 조선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애초부터 후금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고, 패하지 않는 싸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광해군의 특명대로 강홍립은 움직였다.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항복을 지시했는지의 여부는 구체적인 물증이 없지만 통역관 출신이었던 강홍립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현장에서의 상황 판단을 위한 능력을 고려하여 언어가 통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리라.

세상의 중심이었던 명의 기운이 쇠하고 변방의 오랑캐라고 여겼던 만주족의 누르하치가 팽창을 시작한 1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는 격변기였다. 그 변화를 가장 명확하게 파악한 조선의 군주 광해군은 외로웠다. 하지만 그는 현실을 외면하거나 방관하지 않았다. 그는 민첩했고 영민하게 움직였다.

1618년 윤 4월, 명나라의 파병 요청에 찬성하는 비변사 대신들의 상소문이 빗발쳤다. 그들의 주장은 한결 같았다. “명은 우리에게 부모의 나라이며,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풀었습니다. 지금 부모의 나라가 오랑캐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 자식된 도리를 다해야 합니다. 훗날에 우리에게 위기가 닥친 다면 어떤 명목으로 명에게 도움을 요청하겠습니까?”

광해군이 보여준 뛰어난 외교적 수완은 임진왜란 당시 전쟁의 현장을 누비면서 체험한 감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는 국가간의 외교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에서도 탁월했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외교관들은 교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핫 라인’이 유지되어야만 최악의 상황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은 21세기에 도 쉽지않은 획기적인 생각이다. 누르하치의 후금과 명나라를 알기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정보를 파악하던 광해군은, 정보의 우의를 이용하여 명과 후금(청)을 이해시키는데 활용했다.

외교적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 경우를 대비해 화포와 전차를 제작하고, 강화도를 정비하여 피난처이자 요새로 만들었다. 정묘호란시에 강화도로 대피한 인조와 서인정권이 후금과의 협상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광해군의 선견지명 이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대국이었던 명의 일방적인 요구에 조목조목 따지면서 끝까지 거부하려던 광해군의 외교정책은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륙과 해양 세력이 만나는 지정학적 특성으로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걸린 우리에게 외교는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이기 때문이다.

17세기의 명·청 교체기 보다 훨씬 복잡한 열강의 카드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혜안(慧眼)이 요구된다. 민족의 자존과 국가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평화가 전쟁보다 우선임은 분명하다.


오룡(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