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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룡의 역사 타파(95)

오룡의 역사 타파(95)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끄러운게 아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게 부끄러운 것이다.

1937년 젊은 문학청년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하던 즈음에 만주 곳곳에 황군이 몰려왔다. 오래전에 나라를 빼앗긴 조선은 말과 글을 쓰지 못했고, 징병과 공출로 신음했다. 식민지의 어둠이 짙어질 때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반듯한 청년 윤동주는 끝내 아침을 보지 못하고 쓰러졌다. 오뚝하고 곧은 콧날, 크고 선한 눈망울, 유난히 흰 살결의 청년 윤동주는 1917년 만주 간도 명동촌의 유복한 집에서 태어났다. 항일 감정이 특출난 마을에서 어린 동주에게 사촌형 송몽규와 친우인 문익환의 영향은 컸다.

1932년 윤동주는 고향 명동을 떠나 용정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은진중학교 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었다. 축구 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늦게까지 교내 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윤동주는 불같이 행동하는 실천적인 투사가 아니다. 그는 외부의 압력에 적극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이를 용납하지 못하는 양심의 괴로움으로 슬퍼하는 내면적인 사람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입학한다.

1943년 7월, 여름방학을 앞두고 귀향 준비를 서두르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사상범으로 교토경찰서 고등계에 검거된다. 이들의 죄명은 ‘사상불온·독립운동·비일본신민·서구사상 농후’ 등이다. 그러나 이들이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다는 증거는 없다. 윤동주는 2년 형, 송몽규는 2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용된다. 1945년 간도 명동촌의 집으로 윤동주의 사망을 알리는 전보 통지서가 날아든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아버지 윤영석이 당숙 윤영춘과 함께 시신을 넘겨받으러 일본으로 떠난 며칠 뒤 다시 “동주 위독함, 원한다면 보석할 수 있음, 만약 사망 시에는 시체를 인수할 것, 아니면 규슈제국대학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이라는 내용의 우편물이 늦게 도착한다. 복도에 들어서자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 명이 주사를 맞으려고 시약실 앞에 쭉 늘어선 것이 보였다. (····) 몽규가 반쯤 깨어진 안경을 눈에 걸친 채 내게로 달려온다. 피골이 상접이라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하였다. (····)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이 모양으로…….”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한 윤영춘의 기록이다.

일제는 살아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세균 실험을 했는데, 윤동주도 바로 그 생체실험에 이용되어 죽은 것이다.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던 송몽규도 그로부터 23일 뒤 윤동주의 뒤를 따른다. 방부 처리를 해놓아 윤동주의 시신은 말끔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이런 세상에서 시를 쓰길 바라고, 시인이 되길 원했던 게 부끄러워”하다 적국의 땅에서 스물여덟의 생을 마감했던 시인 윤동주. 그가 남긴 ‘참회록’을 읽은 적이 없어 보이는 대한민국 정치인들은 그저 앵무새처럼 ‘서시’만을 암송한다.

그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