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맑음동두천 26.1℃
  • 맑음강릉 20.5℃
  • 맑음서울 25.5℃
  • 맑음대전 26.8℃
  • 맑음대구 27.8℃
  • 맑음울산 26.3℃
  • 맑음광주 26.7℃
  • 구름조금부산 22.9℃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2.7℃
  • 맑음강화 23.3℃
  • 맑음보은 25.7℃
  • 맑음금산 26.1℃
  • 맑음강진군 27.2℃
  • 맑음경주시 29.3℃
  • 맑음거제 27.0℃
기상청 제공

오룡의 역사 타파(102)

오룡의 역사 타파(102)

 

운명을 가른 역사적인 사건의 중심에서 몰락한 지도자

-시대의 흐름을 거부한 위화도 회군의 좌군 도통사 조민수

 

1388년 음력 57, 5만여 명의 요동 정벌군은 압록강 하구 위화도에 있었다. 계속되는 장마비에 고립된 정벌군에게 우왕과 최영은 요동으로의 공격을 지시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역할 수 없다.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할 수 없다. 왜적이 침입할 수 있다. 장마철이라 활의 아교가 녹아 풀어지고 전염병이 발생할 수 있다.”4불가론을 주장했던 이성계는 조민수를 설득했다. 마침내 위화도 회군이 이루어졌다.

 

성공한 반란군의 실질적인 총사령관이었던 좌군도통사 조민수는 권력의 중심에 섰다. 그는 당대의 대유학자 이색을 끌어들여 우왕의 아들인 창왕을 즉위시켰다. 회군을 주도한 이성계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어쩌지 못했다.

 

창왕의 나이 9살에 불과하나 장성하면 회군 세력을 반란군으로 규정하여 제거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조민수는 거침이 없었다, 이성계와 맺은 연합전선을 붕괴시킨 그는 권문세족의 화신이었던 이인임과도 결탁하려 했다. 부패하고 노회한 구세력과 손을 잡으려 했으니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임을 선포한 격이다.

 

이인임과 임견미는 물푸레나무를 휘두르며 농민들의 토지를 강제로 빼앗고 멀쩡한 백성들을 노비로 만들었던 인물들이다. 이들과의 차별화를 분명히 했어야 하는 조민수는 권력에 취했다. 공신첩과 5도 도통사의 막강한 관직을 이용해 백성들의 전민(田民)을 빼앗아 축재(蓄財)했다. 시대적 과제인 토지개혁의 반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기회를 엿보던 회군의 동지, 우군도통사 이성계는 신진사대부의 조준과 결탁하여 한방을 준비한다. 사전(私田)개혁을 반대하던 조민수는 대사헌 조준의 상소로 몰락한다. 주군(州郡)을 경계로 대토지를 소유했던 권문세족의 기득권을 지지해 준 그를 동정하는 사람은 없었다. 신진사대부의 개혁파들을 외면하고 보수적인 기득권 세력들과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조민수의 몰락은 예상된 결과였다.

 

위화도 회군 당시에 이성계 보다 더 높은 지위에 있었던 조민수가 실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몰아 낸 우왕의 아들을 후사로 세우고, 이성계와의 연합전선을 먼저 파기하여 명분마저 상실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정도전과 조준을 앞세워 권문세족들의 토지문서를 모아 개경의 왕궁 앞에서 불태웠다. 토지문서가 여러 날 불탔다는 <고려사>의 기록은 고려 백성들의 오랜 한이 풀렸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백성들의 아픔을 끌어안고 실체적인 공약을 현실에서 보여준 사전개혁은 이성계의 시대를 확고히 하는 사건이었다.

 

이성계의 과전법으로 토지를 나누어 받은 백성들이 쌀밥을 이밥이라 불렀다고 하는 것의 사실여부를 떠나 실질적인 복지정책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잠깐의 권력에 취하여, 권력을 이용하여 탐욕의 끝판왕으로 군림했던 조민수는 <고려사>간신조에 실렸다. 이런 걸 유취만년(乳臭萬年)이라 할 것이다. 냄새를 만년 동안 풍기더라도 좋은 냄새가 아니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