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 맑음동두천 26.7℃
  • 맑음강릉 20.5℃
  • 맑음서울 27.4℃
  • 맑음대전 28.9℃
  • 맑음대구 31.3℃
  • 맑음울산 24.0℃
  • 맑음광주 29.3℃
  • 맑음부산 24.7℃
  • 맑음고창 ℃
  • 맑음제주 22.0℃
  • 맑음강화 22.8℃
  • 맑음보은 27.5℃
  • 맑음금산 27.8℃
  • 맑음강진군 29.4℃
  • 맑음경주시 29.5℃
  • 맑음거제 27.3℃
기상청 제공

오룡의 역사 타파(103)

오룡의 역사 타파(103)

 

타락한 권력을 비판하고 벼슬을 거부한 조식은 말한다 - 나라를 엎을 수도 있는 존재는 백성이다.

 

조선의 선비는 칼을 차지 않았다. 선비에게 칼은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 경상감사 이양원이 부임 인사를 하며 무겁지 않으십니까?” 라고 묻자 뭐가 무겁겠소. 그대의 허리춤에 있는 금대가 더 무거울 것 같은데라고 답했던 조식은 칼을 찬 선비였다.

 

전하의 국사(國事)가 이미 잘못되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하여 천의(天意)가 이미 떠나갔고,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시시덕거리면서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어물거리면서 오직 재물만 불립니다. 백성들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으며

 

1555년 단성현감을 제수 받은 조식은 단호했다. 명종의 집권 10년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일 정도로 혹평의 사직 상소를 썼다. “신은 이 때문에 깊이 생각하고 길게 탄식하며 낮에 하늘을 우러러본 것이 한두 번이 아니며, 한탄하고 아픈 마음을 억누르며 밤에 멍하니 천장을 쳐다본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자전(慈殿:문정왕후)께서는 생각이 깊으시지만 깊숙한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으시고, 전하께서는 어리시어 단지 선왕의 외로운 후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 사건을 조작한 윤원형과 문정왕후가 시퍼렇게 살아있었다. 조선을 공포 분위기로 만들어 선비들을 살육하던 시기에 금기의 영역을 건드린 단성현감 사직상소는 칼을 찬 은거 처사(處士)조식을 조선 최고의 선비로 만들었다.

 

15722, 남명 조식은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직전에 제자인 김우옹이 스승의 사후 칭호를 무엇이라 할 것인지 묻자, 조식은 처사로 쓰는 것이 옳다.”라고 답했다. 그가 지향했던 삶이 무엇이었는가를 보여준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홍의장군 곽재우와 정인홍, 김면 등 인물이 많이 나왔던 것도 칼을 찬 선비 조식의 정신을 물려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을 먼저 다스리고 사람을 다스리는 것을 기본으로 삼았다. ()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 밖의 일을 처리했다. 이러한 신념에 따라 그는 철저한 자기 절제로 일관하였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다.

 

조식이 64세 때인 1564년에 퇴계 이황에게 보낸 편지가 오늘의 현실과 닮았다.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을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지만 지금은 이름 대신, 재산을 남긴다. 재산을 모으기 위해서는 도의도, 염치도 내팽개쳤다. ‘막장 캐릭터들이 너무 많아 웬만한 막장 드리마는 축에도 낄 수 없다. 제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는, 그들은 양아치다.

 

오룡 (오룡 인문학 연구소 원장, 경기도립 중앙도서관 강사)